* 위의 글은 국악센터 홈페이지에서 퍼와 사진을 보완했습니다.                                                                                                  

화제의 인물 " 잊혀진 소리꾼과 세상을 이어주는 오작교 - 정창관"


과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세월 속에 묻혀진 국악인들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지만 사진 한 장, 음반 한 장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마음만으로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자료를 만들어 남기는 일에 직접 뛰어든다는 것은 국악계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던 것이 현실이다.
홍콩상하이은행 부지점장 이라는 자신의 본업을 뒤로하고
, 잊혀진 국악인들을 찾아서 자신의 사비私費를 털어 음반을 제작하여 국악계에 알려진 인물 정창관. 그의 이름을 건 '정창관 국악녹음집' 네 번째 음반이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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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분야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1집부터 4집까지의 표지도 국립중앙박물관에 계신 미술부장님께서 저의 의도를 아시고 매번 좋은 그림을 선정해 주시거든요. 이렇게 많은 분이 도와주시고 격려도 해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
그가 제작한 음반의 표지에는 다른 음반에서 필수 문구처럼 사용하고 있는 '이 음반에서 무단복제하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라는 문구 대신 '여기에 수록된 자료들은 영업외의 목적이라면 녹음하여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라고 적혀있다. 또한 이번에 발매된 음반을 비롯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음반은 1000매에 한정해서 제작되었다. 그 이유는 음반을 제작하는 이유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만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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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음반자료로 남겨야 할만큼의 가치가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 분들이 조언을 해주시죠. 그 가운데에서도 고령이어서 더 늦어지면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고, 지금까지 한번도 독집으로 음반을 발매한 적이 없는 분들을 기준으로 선정을 합니다."
이번 음반엔 '여성국극' 최고 전성기 시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박보아, 박옥진' 자매 의 목소리를 담았다.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 이보형과 박송희 명창의 소개로 두 자매를 알게된 정창관은 이들의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활동을 중단한지 몇 십년이 된 이들을 설득해서 작업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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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방송에서 국악자료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 동안 계속 해오던 일이라서 잘된 것 같습니다."
취미로 중고 음반시장을 돌아다니며 음반을 수집하다가 우연히 국악과 인연을 맺게된 그는 이제 그 일을 본업으로 하게 되었다. 그 동안의 그의 활동은 우리 국악계에서 누군가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 아직도 너무나 많은 숨은 국악인들이 세인들의 관심을 기다리고 있다. 한사람이 이루어내기는 매우 벅찬 일이겠지만 매년 한 장씩의 음반을 내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와 열정은 앞으로 더 많은 성과물을 만들어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 안은숙(oriens@kukakcenter.com)
사진
. 정기헌(ecoeco@kukakcenter.com)

정창관 국악녹음집(4)의  주인공 박보아, 박옥진 자매

"다시는 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아휴 이렇게 흉한 얼굴로 무슨 인터뷰. 창피해서 안 할라요. 다시 들어봐도 소름이 끼치는 게 남사시러워서 원"이라며 취재진을 보자마자 박보아 씨(81 세)가 눈길을 피한다.
인터뷰를 위해 방배동 아파트를 찾은 취재진을 보고는 아무래도 인터뷰를 허락한 것이 후회되는 듯 박보아, 옥진 자매는 딴 색을 하며 거절했다. 다행히 함께 간 정창관 씨 덕분에 간신히 설득해서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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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으면 소리연습 더 하고 녹음을 하는 건데 사람들이 듣고 뭐라 그럴까봐 걱정예요"라며 언니 보아 씨는 50여 년 만에 소리를 다시 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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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언니를 위해 찬조출연 한 거죠. 잘 해보려고 힘껏 노력했는데 부끄러워요. 많은 도움으로 음반을 발매하게 돼서 감회도 깊습니다"라는 동생 옥진 씨(68세) 는 생각만큼 녹음이 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50년 만에 소리를 하는 두자매
박보아, 옥진 자매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미 여성국극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나서는 '소리판'을 떠났기 때문이다. 언니 보아 씨는 1950년대에 동생 옥진 씨는 1968년 소리판을 떠났다. 둘 다 한창의 나이에 소리판을 떠났던 것은 어떤 연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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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으로 돈을 참 많이 벌었어요. 그 돈을 모두 춘향전이란 영화제작에 투자했는데 폭삭 망했어요. 재기의 여지도 없이 아주 폭삭 망한 거지. 그 이후로는 소리한다는 게 지겨웠어요. 그래서 소리판을 떠났어요."
언니 보아 씨는 잘나가던 '삼성'이란 여성국극단체의 대표로 있었다. 삼성은 보아 씨의 남동생 병기(사망), 여동생 옥진 이렇게 삼남매가 운영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여기에는 옥진 씨의 남편인 김향(사망)이 기획, 연출에 참여하여 ' 송죽 ', ' 우리국악단' 과 함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다. 이 때의 여성국극이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는가 하면 공연이 끝나면 '가마니 자루에 돈을 쓸어 담을 정도 ' 였다고 하고 극장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몰려 유리창이 깨지고 시설물이 박살나는 경우가 많아 여성국극은 아예 자리를 내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큰 돈을 벌었기에 영화제작에 투자했던 것.
그 후로 보아 씨는 소리를 그만두었고 옥진 씨는 국극단의 영화투자 실패로 이곳저곳 여성국극단체를 전전하면서 소리를 했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아 1968 년 이래로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한다 .
이처럼 두 사람은 어렵게 다시 소리를 시작했다. 음반 작업을 위해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워낙 한 맺힌 소리였기에 다시 시작한다는 두려움이 남달랐다.

박송희 명창의 끈질긴 설득으로 음반 취입
박송희 명창(월간 국악 8월호 명인, 75세)은 이들과 여성국극단체에서 함께 활동한 인물. 평소 언니라고 부르며 보아 씨를 따르던 박송희 명창은 자매의 음반을 내자는 정창관 씨의 제의를 받고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하면 된다며 이들을 녹음실로 데려갔고, 역시 함께 활동했던 조순애 명창(73세)과 남도잡가의 뒷소리를 받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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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처럼 섹섹하지는 않지. 그래도 한가닥 하던 소린데 그 실력이 어디 가겠어."
박송희 명창은 어렵사리 음반을 낸 보아, 옥진 자매가 그렇게 미더울 수가 없다. 젊은 청춘을 여성국극으로 함께 한 정을 생각하면 당연히 애틋하고 살갑게 느껴질 수밖에.
사실, 이 작업에는 정창관 씨뿐만이 아니라 반주자들도 무보수로 나서는 등 많은 이들이 자매의 음반작업에 동참하여 훈훈한 정을 느끼게 했다. 아쟁의 윤윤석, 대금의 원장현이 기꺼이 응해 더욱 가치 있는 음반 작업이 될 수 있었다.
마침 인터뷰 자리에 함께 한 옥진 씨의 딸 성애 씨는 "음반을 듣고 눈물을 흘렸어요. 소리를 그만두시고 나서는 무심코 지내왔는데 자식도 아닌 남이 이렇게 음반을 내주셔서 송구스럽기도 하고요. 마침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려요"라며 눈시울을 감춘다.

알고 보면 온 집안이 국악인

박보아 씨는 거문고산조의 인간문화재였던 한갑득 명인의 부인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남동생의 아들집에서 생활하고 있고, 동생 옥진 씨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마당극으로 일약 유명해진 김성녀가 큰딸, 마당놀이 연출가 손진책이 사위이고 세째딸 김성애는 오정숙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사사 받고 있으며, 막내딸 김성아는 해금연주자로 각광을 받고 있다. 게다가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박종기와는 먼 인척이 되며 진도씻김굿의 인간문화재 박병천과는 팔촌간이다. 알고 보면 집안은 모두 국악인 집안이요 또한 모두 진도태생이다.
보아 씨는 어려서 목청이 좋다하여 16살에 박종기와 함께 서울로 와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소리를 익혔다. 송만갑, 정정렬에게 「심청가」, 「춘향가」를 배웠고 이후로 조선창극단, 아성창극단, 동일창극단 등에서 국극활동을 하였다.
동생 옥진 씨는 5살에 언니 보아 씨의 손을 잡고 상경하여 6, 7살 때부터 조선성악연구회의 아역부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소리를 하게 된 것은 국극에서 박귀희의 남자역할을 보고 반하면서부터. 언니의 반대도 심했지만 결국 이렇게 해서 자매는 소리의 길로 들어섰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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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잃어버릴 소리, 날아갈 버릴 소리'가 될 뻔했던 보아, 옥진 자매의 소리는 이렇게 몇몇 개인의 힘에 의해 지켜지게 됐다.

글 엄덕영 adam@kukakcenter.com 사진 정기헌 ecoeco@kukakcenter.com

www.kukakcenter.com에서 박보아, 옥진 자매와 정창관 씨의 동영상 인터뷰 실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정창관 국악녹음집 1. <<강순영의 국악세계>>

강순영 명인은 15세 때 국악에 입문하여 가야금산조로 귀신같은 솜씨를 자랑하던 신관용에게 3년간 신관용제 가야금산조를 사사 받았다. 27세 때부터 남원 국악원에서 5년간 가야금 사범으로 있었는데, 이때 기른 제자가 오갑순, 안숙선, 안옥선, 강정렬 이다. 39세 이후로 지금까지 진주에 은거하며 제자를 기르고 있다.

정창관 국악녹음집 2. <<조순애의 국악세계>>

조순애 명창은 박기채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하였다. 이후 조몽실, 조상선 문하를 거치며 판소리, 창극 지도를 받았다. 1960년경에 상경하여 박초월 문하에서 수궁가를, 1971년은 박록주 문하에서 흥보가를 배웠다. 조순애 명창은 젊은 시절에는 활발한 활동을 하였지만, 40세 무렵 인간문화재 故 김동준 명인과 혼인하면서 국악활동을 거의 중단하였다.

정창관 국악녹음집 3. <<김영택의 국악세계>>

이 음반은 김영택 명인의 첫 독집음반이며 유작음반이다. 김영택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은율탈춤)이다. 그는 피리의 명인이지만 태평소와 소리에도 능했다. 이 음반은 김영택 명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조금씩 담고 있다. 김영택 명인이 운명을 달리하기 10일전 이 음반이 헌정 되었다.

정창관 국악녹음집 4. <<박보아, 박옥진 자매의 국악세계>>

박보아 박옥진 자매는 여성국극 전성시대에 최고의 배우로 명인 소리를 들었을 뿐 아니라, 남도 잡가로도 첫손을 꼽는 명창들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육자배기, 흥타령, 개고리타령은 천하일품이라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세월이 바뀌어 영화가 보편화되면서 여성국극도 점차 쇠퇴하였고, 그 좋은 남도잡가를 알아주는 이도 드물게 되면서 활동을 중단한 자매의 첫 음반이다.

글 엄덕영 adam@kukakcenter.com
안은숙
oriens@kukakcenter.com
사진 정기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