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관마지막국악녹음집(15) <소사영의 국악세계>-성독과 시창-  해설서 내용 전문                 

 

    

창관 마지막 국악녹음집(15) C K Jung’s Last Korean Traditional Music Recording Series(15)

소사영의 국악세계

Korean Traditional Music World of So SA-Young

-성독과 시창- Recitative Reading & Unmetered Lyric Song

소리:한학자 동국 소사영

Reader : Scholar of the Chinese Literature, Dongkuk, So Sa-Young

 

 

■성독

01 <중용> 서문 10:24

02 <맹자> 양혜왕장구 상 09:02

03 <명심보감> 계선편~효행편 08:24

04 <천자문> 05:26

05 적벽부 전편 (소리:소헌영) 05:40

■시창

06 등왕각시 01:37

07 영남루시 01:55

■경

08 오방동토경 05:02

소리:소사영

[보너스트랙]

■당음(여름글)

09 오언시 03:28

10. 칠언시 05:20

■축문

11. 기제사, 시제 04:01

■국문소설

12. 사씨남정기 13:06

소리:소헌영

총녹음시간 : 73:52


○ 기획·제작: 전통예술평가위원회 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서초국악포럼 좌장:010-2023-4390)

○ 음반 해설:이보형. 소병돈, 허갑균

○ 녹음:2012년 8월 11일. 마장동 유니버살스튜디오(녹음:진관섭)

○ 마스터링.편집: 양정환(한국고음반연구회 회원, 예술기획탑 대표)

○ 제조:2012년 9월 7일 ○인쇄:도서출판 무송

* 여기에 수록된 자료들은 영업외의 목적이라면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됩니다.

○ 모든 국악음반의 자세한 내용은 제작자가 운영하는 비영리사이트 “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www.gugakcd.kr)를 참조하세요!

이 음반의 제작비 일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금입니다. 지원에 감사합니다.


<소사영의 국악세계>를 마지막으로 기획·제작하면서.....

정 창 관

전통예술경연대회 평가위원회 위원장

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서초국악포럼 좌장

이 땅의 잃어버릴 소리, 날아가 버릴 소리를 후손에게 남기기 위해서, 올해에는 ‘정창관 마지막국악녹음집’ 제15집으로 <소사영의 국악세계>를 기획·제작하였다. 소사영 어르신은 한학자로 ‘국악세계’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출반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나, 본 시리즈의 정체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일한 제목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밝힌다.

1998년 제1집 <강순영의 국악세계>, 1999년에 제2집 <조순애의 국악세계>, 2000년에 제3집 <인간문화재 김영택의 국악세계>, 2001년에 제4집 <박보아 박옥진 자매의 국악세계>, 2002년에 제5집 <신용춘의 국악세계>, 2003년 제6집 <김경성의 국악세계>, 2004년 제7집 <박홍남의 국악세계>, 2005년 제8집 <박대성의 국악세계>, 2006년 제9집 <조영숙의 국악세계>, 2007년에 출반한 제10집 <1896년 7월 24일, 한민족 최초의 음원> 음반을 출반하고, 2008년 제11집 <박덕화의 국악세계>에 이어, 2009년에는 2007년에 출반한 제10집 <1876년 7월 24일, 한민족 최초의 음원>의 소리꾼을 알게 되어 재출반하고, 제12집 <김화선의 국악세계>, 2010년 제13집 <오한수의 국악세계>, 2011년에는 제14집 <김응학의 국악세계>를 출반하고, 올해에는 제15집 <소사영의 국악세계>를 출반하게 되었다. 계획대로 매년 한 장을 출반한 것이다.

이번 15집은 시리즈의 마지막 음반이다. 음반을 출반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간다. 어르신을 발굴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문예기금 지원을 받으면 좀 쉽게 출반작업을 하나, 지원이 없으면 제작하기가 무척 힘든다. 또 내가 지원을 받으면 다른 사람이 지원을 못 받는 꼴이 되니 언제가는 멈추어야 할 작업, 올해 60살, 환갑을 맞으면서 끝내려 한다.

년초에 국악방송국의 음원확보 자문회의에 참석한 후, 본시리즈 제작를 그만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국악방송이 나와 동일한 이유로 음원확보 계획을 가지고 있고, 훨씬 더 훌륭하게 국악음반을 제작할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사영 어르신은 한학자이시다. 충남 청양에서 한학을 하시는 분인데, 본시리즈의 인쇄를 맡아 온 허갑균 선생(한학 공부 중)이 소개를 하여 녹음하게 되었다. 한문의 성독과 시창은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남원의 국립민속국악원에서 시리즈로 음반을 출반하기도 하였으니, 국악이란 이름으로 음반을 출반하는 것이 쌩뚱맞지는 않은 것 같다.

녹음은 어르신 한 분을 모셔 성독과 시창을 녹음하기로 하였으나, 동생분(소헌영)이 당음, 축문, 국문소설 읽기에 재능이 뛰어나다하여 같이 모셔 녹음하였으며, 동생분의 녹음은 보너스트랙으로 담았다. 동토경, 당음, 축문, 국문소설은 희귀한 녹음이 될 것이 분명하다. 생전 녹음이란 것을 해보지 못한 어르신들이 더운 날씨에 고생이 많았고, 귀중한 자료들을 남길 수 있어 녹음하는 내내 즐거웠다.

이 음반은 일련번호를 부여한 1,500매 한정반으로 제작한다. 1,000매는 여느 시리즈같이 사용하고, 500매는 환갑을 기념하여 KOUS에서 9월 7일에 개최하는 ‘정창관국악녹음집 출반 15년 기념연주회 및 반락 이야기’의 관람객에게 선물로 사용할 예정이다. 국악FM방송 청취자, KBS FM 청취자(국악프로), 객석 구독자들은 무료(?)로 음반을 가질 기회가 있을 것이며, 한학 관련 분들에게 많이 배부할 예정이다.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예술기획탑의 쇼핑몰인 www.gugakcd.com 등에서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도 표지에 CCL 마크를 삽입하였다. 의미는 저작자와 출처 등을 표시하면 저작물의 변경, 2차적 저작물의 작성을 포함한 자유이용을 허락하나, 단 영리적 이용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15년 동안 예술기획탑의 양정환 대표님은 녹음, 마스터링, 제작 등, 전 과정에 자기 일같이 도와주었다. 감사합니다. 소개글을 써주신 이보형 선생님, 15년동안 해설서 인쇄를 맡은 무송출판 소담 허갑균 사장님, 이번에는 한문 가사도 정리를 해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님이 녹음을 한다하여 제작 전과정에 참여한 현암 소병돈 선생님 고생 많으셨고, 직접 해설서도 맡아주었습니다. 청우(淸羽)라는 좋은 호를 지어주어 감사합니다.

음반 제작을 지원해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감사드리며, 마지막으로 돈을 쓰는 것을 이해해주는 마눌님 항상 고마워요.

2012년 9월 7일

월계1동 현대아파트에서

청우(淸羽) 정창관

* 정창관 국악후원회

구좌: SC은행 광화문지점 / 130-20-389890 정창관

전화: 02-943-4390 /손전화: 010-2023-4390

홈페이지: 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 (www.gugakcd.kr)

정창관의 국악이 보인다(www.gugakebook.com)

이메일: ckjungck@hanafos.com


정창관 마지막 ‘국악녹음집 15’ 음반 서문

-충청도 마지막 선비의 낭송음악문화-

이 보 형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

한국고음반연구회 정창관 선생이 매년 경향에 묻혀 있는 귀중한 전통음악 명인명창들을 찾아 그 음악을 녹음하여 음반을 내어 왔는바, 이번에는 사라져가는 충청도 선비들의 낭송음악을 찾아서 음반으로 엮어 <정창관국악녹음집 15>를 내었다.

유교에는 종교적 성격상 제례음악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종교음악이 없다. 그런 연유로 한국의 유교에서 선비들은 가창행위를 경원하였고 그 때문에 따로 선비들이 부르는 가창음악을 찾기가 어렵다. 굳이 선비의 가창부문을 찾자면 경전을 낭송하는 음악부문을 들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선비들이 낭송하는 음악부문의 특성에 대하여 김영운, 박정경 등등 몇몇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지만 이는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 치우치고 있고 충청도 전라도 선비의 음악에 대하여는 크게 다루지 못 한 것 같다.

이번 정창관 선생이 기획한 선비 낭송음악은 충청남도 청양지역을 중심으로 충남 유림들과 활동을 하고 있는 동국(東菊) 소사영(蘇仕永) 선생이 부른 낭송음악 부문을 중심으로 하였고 여기에 소사영 선생의 제씨 소헌영 선생의 낭송음악을 곁들였다.

소사영 선생이 부른 낭송음악부문은 성독(聲讀), 시창(詩唱), 오방동토경(五方動土經)이고, 소헌영 선생이 부른 낭송음악부문은 당음(唐音), 축문(祝文), 국문소설(國文小說)이다.

[성독]이란 경전을 낭송하여 읽는 소리로 흔히 [독서성(讀書聲)]이라 이른다. 전통사회에서는 선비들이 대부분 경전을 성독하였다. 성독은 전승지역의 기층음악 문법으로 되었다. 자유리듬이며 비 고정 선율로 되었다. 오늘날은 전통성독이 사라지고 음독(音讀)으로 대신하기 때문에 이것은 기층음악과 관련이 없다. 이 음반에서 성독은 소사영 선생이 부른 [중용] 서문, [맹자] 양혜왕 상편, [명심보감] 계선편~효행편, [천자문] 일부이고, 여기에 소헌영 선생이 부른 [전 적벽부]를 곁들였다.

[시창]이란 오언 또는 칠언 한시를 정가풍(正歌風)으로 부르는 성악부문으로 일명 율창(律唱)이라 이르기도 한다. 시창은 시조창에 가까운 정가풍이므로 전국적으로 대개 곡조가 같다. 일정한 박자는 없지만 대체로 고정 선율에 가까워 음악성이 짙다. 유장하고 정대하고 미려하다.

[동토경]이란 독경(讀經)의 한 가지이다. 동토라는 말은 흔히 ‘동티’라 알려진 것으로 땅을 잘 못 다스려 난 병을 말하며 동토병이 났거나 땅을 다스리기 전에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부르는 경문을 가리킨다. 독경 또한 전승지역의 기층음악 음악어법으로 되어 전승지역마다 토리가 다르다. 불규칙한 박자에 비고정선율로 되었다. 꿋꿋하다.

[당음]은 오언 또는 칠언 한시를 민요풍으로 부르는 성악부문으로 [시창]과 다른 점은 시창은 정가풍으로 되었지만 당음을 민요풍으로 되었다. 그래서 당음은 전승지역의 기층음악 문법으로 되었고 그래서 전승지역마다 토리가 다르다. 충청도 선비의 당음은 남도민요 풍이다. 대체로 일정하지 않지만 한시 한 행이 대개 빠른 8박쯤 된다. 민요풍이라 정겹고 음악성이 짙다. 서당의 학동들이 여름에 낭송한다 하여 ‘여름글’이라 이르는 것이다. 소헌영 샌성이 부른 것은 오언과 칠언을 모두 창하였다.

[축문]은 유교식 제사에서 조상에게 고하는 낭송문이다. 소헌영 선생이 부른 것은 [기제사] 축문과 [시제] 축문을 나누어 가창하였다. 축문 또한 기층음악으로 되어 전승지역 마다 토리가 다르다. 소헌영 선생이 부른 것은 남도제이다. 자유리듬에 비 고정 선율로 되었다. 유장한 느낌이 든다.

[국문소설]은 전통사회에서 언문(한글)소설을 낭송조로 읽는 독서성이다. 전승지역의 기층음악 문법으로 되었다. 자유리듬이며 비 고정 선율로 되었다. 오늘날은 소설 성독이 사라지고 음독(音讀)으로 대신하기 때문에 기층음악과 관련이 없다. 이 음반에서 국문소설 성독은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이다.

유교가 지배적인 전통사회에서는 이런 선비들의 낭송음악문화가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하였었지만 서구 문화에 의한 근대화로 전통사회문화가 변동되면서 선비들의 낭송문화를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선비들의 문화가 소멸된 뒤에 이 음반자료는 선비 낭송문화를 담은 귀한 자료로 평가될 것이다.

정창관 선생은 금년에 회갑을 맞는다. 그동안 사재를 들여서 15회나 전통음악을 발굴하여 음반을 내었다. 그동안 음반에 취입된 상당수의 보유자들이 세상을 떴고 그래서 정창관 국악녹음집이 유일한 자료로 남은 것이 많다. 그래서 정창관 국악녹음집은 귀한 것이다. 정창관 선생은 이번 음반으로 판을 막는다고 한다. 새로 보유자를 찾기도 어렵지만 사재를 들여 발행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버거운 일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런 일에 동참하여 이런 귀한 일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마음이다.


東菊 蘇仕永 先生님

素潭 허갑균 (도서출판 무송 대표)

동국 소사영 선생님은 1934년 내륙의 섬으로 불리는, 앞으로는 금강을 두르고 뒤쪽 멀리 칠갑산을 등진 충남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의 여느 빈농에서처럼 풍족한 가정환경과는 거리가 멀어 해방 이후 국민학교를 마치고 가학인 한문을 공부하며 본격적인 한학을 수련하였다.

인근 한학 대가를 찾아 학업을 게을리 않던 중에 20세 때에 華菴 洪在俊 선생님을 찾아가 四書五經을 공부했는데, 화암 홍재준 선생님은 당시에 기호학파의 학문전통을 온전하게 계승하던 분이었다. 특히 홍선생님은 사서 중 中庸의 대의와 해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분이기도 하였다.

한문의 외연을 넓혀가던 소사영 선생은 충남 아산출신의 石雲 崔炳大 선생님을 만나 諸子百家 등의 학문을 익힌 바, 석운 최병대 선생님은 매헌 윤봉길 의사에게 한학을 지도했던 명망있는 분이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 군대에 다녀온 후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고 가학을 이으며 농사를 짓던 중에, 상급학교 진학률이 지금과는 다른 오지농촌에서 동리 어른들의 간청에 못이겨 32세 때인 1966년부터 시골집 사랑방에 서당 즉 글방을 열고 인근의 상급학교 미취학 청소년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도시의 급격한 산업화와 상급학교 진학률이 급등하던 1970년 후반까지 서당은 성황을 이뤄 나름대로 농촌에 필요한 인재를 배출하였다.

아직도 비교적 유교문화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충남 서남부의 청양, 홍성, 부여, 논산, 공주 지방에는 양반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향교, 서원들이 산재해 있어 운영과 관리에 전문가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허다함을 부인할 수 없다.

동국 선생님은 옛날 정산현이었던 청양군 정산면 소재 정산향교의 전교, 부여 창강서원 원장 등 지방유교문화의 유지와 계승자로 활동하며 충남, 대전 등지의 유림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서울의 성균관에서도 활동하여 성균관 典學의 직책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학의 후학을 지도함에도 게으르지 않아 청소년 충효교실과 향약 실천운동에도 남다른 열정으로 활동하며, 특히 전국의 각종 한시백일장에서 수차 장원 입상하고, 경복궁에서 매년 열리는 조선조 과거대전재현백일장의 심사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녹음된 글 읽는 소리는 충청도 서남부지방의 글 읽는 소리로 지금 한문을 배우는 것과는 달리 서당에서 글을 외워 배우던 시절의 추억이다.

서당에서 글을 읽을 때 경서를 읽는 방법과 잡서를 읽는 방법이 달랐으며 시를 읽는 시창도 율시창과 여름글이라 하는 당음을 읽는 방법이 달라서 읽는 책에 따라 그 흥취가 완연히 다르고 목청의 구사도 달랐다.

이제 비록 잊혀지는 소리와 풍속들이지만 다행히 동국 소사영 선생님이 재현함에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나 그 원류는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출현한 향곡 소헌영 선생은 평생 서예를 연마한 서예가로 한국서도협회 초대작가이며 장형인 동국 선생님께 직접 한학을 배운 학문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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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및 해설

玄巌 소병돈(현암서당 主宰)

●성독(聲讀)

성독이란 글 읽는 소리이다. 성독은 전통사회에서 한문을 수학할 때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현장 속에 살아있는 소리, 음악이다.

01 <중용> 서문

중용은 본래 대학과 함께 예기에 있던 한 편씩의 엮음 글이었는데 후일 송대에 주자가 독립시켜서 논어, 대학, 중용, 맹자의 사서로 격상된 글이다. 중용은 근래의 학문분류로 보면 교육심리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중용 서문은 옛날부터 귀신도 감동시킨다는 말이 전해지 듯 고도의 정제된 언어로 인간심리의 본질과 동작원류의 상관성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주자의 글이다.

中庸章句序라

中庸은 何爲而作也오 子思子 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니라 蓋自上古로 聖神이 繼天立極而道統之傳이 有自來矣라

중용장구서

<중용>은 무엇 때문에 지었는가? 子思께서 중용의 道學이 상실된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전수하려고 지은 것이다. 대체로 아주 옛날부터 (무불명 무불통한) 성인이 천지의 원리를 계승하여 인극(人極:황제)을 세움으로 중용 도통의 전수가 자연히 유래하게 되었느니라.

其見於經則允執厥中者는 堯之所以授舜也오 人心은 惟危하고 道心은 惟微하니 惟精惟一이라야 允執厥中者는 舜之所以授禹也니 堯之一言이 至矣盡矣而舜이 復益之以三言者則所以明夫堯之一言이 必如是而後에 可庶幾也라

그 도가 경서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진실로 그 중심을 잡고 지키라는 네 글자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帝位)를 전수할 때에 쓴 것이요. 인심(사람의 私心)은 오직 위태하기만 하고, 정도의 마음은 오직 은미하기만 하니, 오직 정수(精粹)하고 오직 한결같이 진실로 그 중심을 잡고 지키라는 열여섯 글자는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제위를 전수할 때에 쓴 것이다. 요임금의 한 구절의 말씀이 지극하고 남김없이 다한 말이지만, 순임금이 그것에 다시 세 마디의 말씀으로서 보탠 것은 곧 대저 요임금의 한 구절의 말씀의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반드시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그 본 뜻에 근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蓋嘗論之컨대 心之虛靈知覺이 一而已矣로대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는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며 或原於性命之正而所以爲知覺者 不同하니 是以로 或危殆而不安하고 或微妙而難見耳라

대체로 전에도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마음의 허령과 지각은 하나일 뿐이거늘, 또 인심과 도심이 다른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형기의 사심에서 생긴다고 여기며, 어떤 경우에는 성명의 바름에 근원한다고 함은 지각하려는 까닭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위태로워 불안하고 혹시 미묘하여 알아보기가 어려울 뿐이다.

然이나 人莫不有是形故로 雖上智나 不能無人心하고 亦莫不有是性故로 雖下愚나 亦不能無道心하니 二者 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則危者愈危하고 微者愈微하여 而天理之公이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리라

그러나 사람은 그런 형체를 가지지 않은 이가 없다. 그러므로 비록 지혜로운 이라도 능히 인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둘이 마음속에 섞여 있어서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더욱 은미하여 천리의 공심(公心)이 마침내 대저 인욕의 사심을 이길 수 없다.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요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니 從事於斯하여 無少間斷하여 必使道心으로 常爲一身之主而人心으로 每聽命焉則危者安하고 微者著하여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리라

정수(精粹)하면 대저 둘 사이를 관할하여 아무것도 섞이는 것이 없이 순수하게 되고, 한결같으면 그 본심의 바름을 준수하여서 떠나지 않고 한결같게 되는 것이니, 이로부터 일을 좇아 조금도 중간에 끊어짐이 없게 하여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항상 내 일신의 주인이 되게 하여, 인심이 매양 이 도심의 명을 듣고 순종케 하면, 위태함은 안정되고, 은미함을 드러나서 동정과 언행에 자연히 초과와 미치지 못함의 차별이 없게 될 것이다.

夫堯舜禹는 天下之大聖也라 而天下相傳은 天下之大事也니 以天下之大聖으로 行天下之大事하사대 而其授受之際에 丁寧告戒 不過如此則天下之理 豈有以加於此哉리오

대저 요 순 우는 천하의 위대한 성인이시고, 천하를 가지고 서로 전수하는 것은 천하의 대사업을 행하시되, 그들이 그것을 주고 받을 즈음에 재삼 부탁해 경계하신 말씀은, 이와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천하의 이치가 어찌 이것에 더 보탤 것이 있겠는가?

自是以來로 聖聖이 相承하시니 若成湯文武之爲君과 皐陶伊傅周召之爲臣이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하시고 若吾夫子則雖不得其位而所以繼往聖開來學에 其功이 反有賢於堯舜者라

이로부터 이후로 성인과 성인이 서로 계승이 되었으니, 성탕과 문왕 무왕 같은 이가 임금이 되고, 고요 이윤 부열 죽홍 소공 같은 이가 신하가 되어, 이미 모두 이것으로서 대체로 도통의 전수에 접하셨고, 우리 선생님(孔子) 같은 분은 비록 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나, 지나간 성인들을 이어 받으셨고 후세 학자들에게 중용의 도를 열어놓았으니, 그 공은 도리어 요순보다 훌륭함이 있다.

然이나 當是時하여 見而知之者 惟顔氏曾氏之傳이 得其宗이러니 及其曾氏之再傳而復得夫子之孫子思則去聖遠而異端이 起矣라

그러나 그때를 당하여 보고 그것을 깨달아 안자는 오직 안회와 증삼의 전승이 그 종지를 얻었고, 그 증삼이 두 번 전하여 다시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깨달음을 얻게 됨에 미쳐서는, 과거 성인과의 세월의 거리가 멀어 이단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子思懼夫愈久而愈失其眞也하사 於是에 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하시고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하여 更互演繹하여 作爲此書하여 以詔後之學者하시니 蓋其憂之也深故로 其言之也切하고 其慮之也遠故로 其說之也詳하니

자사는 대저 세월이 더 오래되면 그 중용지도의 진리를 더 잃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요순으로부터 이후 서로 전수하던 뜻을 근본으로 받들고, 평소에 들은 바 스승의 말씀으로서 본질로 삼아서, 다시 상호 관계를 미루어 풀이하여 이<중용> 책을 만들어서 훗날의 학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대개 그가 근심하던 것들이 깊었던 고로 그의 말한 것들이 간절하였고, 그 우려함이 원대하였던 고로 그의 설명이 자상하였다.

其曰 天命率性則道心之謂也오 其曰 擇善固執則精一之謂也오 其曰 君子時中則執中之謂也니 世之相後千有餘年이로되 而其言之不異如合符節이라

거기서(중용) 말하는 천명(天命)과 솔성(率性)은 곧 도심(道心)을 두고 하는 말이요, 거기서 말하는 택선(擇善)과 고집(固執)은 곧 정일(精一)을 두고 하는 말이요, 거기서 말하는 군자시중(君子時中)은 곧 윤집궐중을 두고 하는 말이니, 세대의 상호 선후 차이가 천여 년이 되었으되, 그 말뜻의 본질이 다르지 아니함이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다.

歷選前聖之書하여 所以提挈綱維하여 開示蘊奧가 未有若是其明且盡者也라 自是而又再傳以得孟氏하여 爲能推明是書하여 以承先聖之統이러니 及其沒而遂失其傳言則吾道之所寄 不越乎言語文字之間이 而異端之說이 日新月盛하여 以至於老佛之徒出則彌近理而大亂眞矣라

전성(前聖)들의 책을 편력(篇歷)하여 골라서 그물 벼리를 잡아끌듯이 하였으니, 학문의 심오한 이치를 열어 보인 것이, 아직이 <중용>같이 그것이 분명하고 또 부족함이 없이 다한 책은 없다. 이로부터 또 두 번째 전수되어(자사-맹자) 맹자를 얻음으로서, 능히 이 책을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어서 선성(先聖)들의 도맥(道脈)을 계승한 것으로 여겼더니 맹자가 세상을 떠남에 미쳐서는 드디어 그 전승이 끊어졌다. 우리들의 도학이 붙어있는 곳은 언어와 문자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단(異端)의 주장은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해져서 벌써[以] 노장과 불타의 무리들이 나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치에 가까운 듯하여 크게 진실로 어지럽게 되었다.

然而尙幸此書之不泯故로 程夫子兄弟者出하사 得有所考하여 以續夫千載不傳之緖하시고 得有所據하여 以斥夫二家似是之非하시니 蓋子思之功이 於是에 爲大而微程夫子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라

그러나 다행히 이 <중용>의 책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호와 정이 선생 형제가 나셔서 또 참고할 것을 얻은 것은, 대저 천년 동안 전하지 않던 통서(統緖)를 계속함으로서, 또 근거한 것을 얻은 것은 노불의 옳은 것 같으나 틀린 것을 물리쳤으니, 대개 자사의 공이 여기에서 위대하였고, 정씨 두 선생이 없었더라면 역시 능히 그 <중용>과 같은 말로부터 그 중심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惜乎라 其所以爲說者 不傳而凡石氏之所輯錄이 僅出於其門人之所記라 是以로 大義雖明而微言이 未析하고 至其門人所自爲說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이나 然이나 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亦有之矣라

애석하도다. 그가 말하려고 생각한 것이 전하지 않고, 무릇 석씨[石대]가 모아 기록한 것은 겨우 그 문인들이 기록한 것에서 나온 것이라. 그러므로 큰 뜻은 비록 밝게 알았지만 은미한 듯의 말은 아직 해석이 안되고, 그 문인들 각자가 논설한 바에 이르러서는 비록 자못 상세하게 설명을 다하여 새로 밝힌 것이 많다. 그러나 스승의 학설에 위배되고 노불(老佛)에 지나치게 빠진 것이 역시 거기에 있었다.

熹自蚤歲로 卽嘗受讀而竊疑之하여 沈潛反復이 蓋亦有年이로대 一朝에 恍然似有得其要領者 然後에 乃敢會衆說而折其衷하여 旣爲定著章句一篇하여 以俟後之君子而一二同志로 復取石氏書하여 刪其繁亂하여 名以輯略하고 且記所嘗論辨取舍之意하여 別爲或問하여 以附其後 然後에 此書之旨이 支分節解하고 脈絡이 貫通하여 詳略相因하며 巨細畢擧而凡諸說之同異得失이 亦得以曲暢旁通하여 各極其趣하니 雖於道通之傳에 不敢妄議나 然이나 初學之士 或有取焉則亦庶乎 行遠升高之一助云爾라

모[熹]는 젊었을 때부터 일찍이 이 책을 받아 읽어보고 저으기 의심이 생겨, 침잠하고 반복함이 대체로 역시 여러해였는데 하루아침에 문득 흡사 그 요령을 터득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 이후에 마침내 감히 여러 학설을 모아 그것을 절충하여 장구 1편을 저술하기를 이미 확정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기로 생각하고, 한두 명의 동지들과 다시 석씨의 책을 모아 그 번잡하고 혼란함을 산정하여 <집략>이라 명명하고, 또 일찍이 논변하여 취사한 뜻을 기록하여 별도로 <혹문>이라 하여 그 뒤에 첨부하었다. 그러한 뒤에야 이책의 취지가 가지마다 나뉘고 마디마다 풀려서 맥락이 관통하고, 상세함과 간략함이 서로 원인이 되고, 크고 작은 것이 모두 들리게 되고, 무릇 모든 학설의 동이(同異)와 득실(得失) 역시 상세히 통찰하여 사방이 통하여 각기 그 취지를 다하니, 비록 도통(道通)의 전수로부터 감히 망령되이 논의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처음 배우는 선비가 혹시 거기에서 취할 것이 있다면, 역시 먼 곳에 가고, 높은 곳에 오르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淳熙己酉春三月戊申에 新安朱熹는 序하노라

순희 기유 춘3월 무신일에 신안 주희는 서문을 짓다.


02 <맹자> 양혜왕장구 상

맹자는 전국시대 추나라 맹가의 저작으로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교에서 공자의 사상을 이어 유교사상의 근간을 세운 맹자는 7편의 저술 중 제 1편인 양혜왕편에서 전쟁으로 날이 지새던 시기에 양혜왕을 찾아가 왕도정치를 역설하는 부분으로 맹자의 치밀한 논리와 양혜왕의 현실적 이해가 날카롭게 충돌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孟子集註大全巻之一

梁惠王章句上이라

凡七章

孟子 見梁惠王하신대

맹자가 양혜왕을 보신대

梁惠王은 魏侯罃也니 都大梁하야 僭稱王하니라. 諡曰惠라. 史記 惠王三十五年에 卑禮厚幣하야 以招賢者而孟軻 至梁하시니라

양혜왕은 위나라 제후인 영이니 대량에 도읍해서 참람하게 왕이라 일컬었다. 시호가 혜이다. 사기 혜왕 35년에 예를 낮추고 폐백을 두터이 해서 이로써 어진 이를 부를새 맹모가 양나라에 이르셨느니라.

王曰叟 不遠千里而來하시니 亦將有以利吾國乎奧잇가

왕이 가라사대 늙은이가 천리를 멀지 않다고 오시니 또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으리잇가?

叟는 長老之稱이라 王所謂利는 蓋富國彊兵之類니라

수는 나이가 많은 어른을 일컬음이다. 왕이 이른바 ‘이’는 대개 부국강병의 유이다.

孟子 對曰 王은 何必曰利이니잇고 亦有仁義而已矣니이다

맹자 대답하여 가라사대 왕은 어찌 반드시 ‘利’를 이르시니잇고 또한 인의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仁者는 心之德이오 愛之理요 義者는 心之制며 事之宜也니라 此二句는 乃一章之大指니 下文에 乃詳言之하야 後多放此니라

인이라는 덕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며 의라는 것은 마음의 지음이며 일의 마땅함이다. 이 두 마디는 이에 한 장(양혜왕장)의 큰 가르침이니 아래 글에 자세히 말했으니 뒤에 이를 많이 본받았느니라.

王曰 何以利吾國고 하시면 大夫曰 何以利吾家오 하며 士庶人曰 何以利吾身고 하야 上下交征利면 而國이 危矣니이다 萬乘之國에 弑其君子는 必千乘之家이며 千乘之國에 弑其君子는 必百乘之家니 萬取千焉하며 千取百焉이 不爲不多矣언마는 苟爲後義而先利면 不奪하야는 不饜이니이다

왕이 가라사대 어찌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꼬 하시면 대부 가로대 어떻게하면 내 집을 이롭게 할꼬 하며, 사와 서인이 가로대 어떻게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꼬 하야 위아래가 사귀어 利를 취하면 나라가 위태하리이다. 만승의 나라에 그 인군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집이요, 천승의 나라에 그 인군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이니, 만이 천을 취하며 천이 백을 취함이, 많지 않음을 함이 아니건마는 진실로 義를 뒤에 하고 利를 먼저 하면 뺏지 아니하고는 족하지 아니하나니이다.

此는 言求利之害하야 以明上文 何必曰 利之意也니라 征은 取也니 上取乎下하고 下取乎上故로 曰 交征이요 國危는 謂將有弑奪之禍요 乘은 車數也라 萬乘之國者는 天子畿內에 地方千里로 出車萬乘이오 千乘之家者는 天子之公卿으로 采地方百里에 出車千乘也라 千乘之國은 諸侯之國이오 百乘之家는 諸侯之大夫也니라 弑는 下殺上也이요 饜은 足也이니 言臣之於君에 每十分而取其一分이면 亦已多矣라 若又以義爲後而以利爲先則 不弑其君而盡奪之면 其心이 未肯以爲足也니라

이는 利를 구하는 해로움을 말하므로써 윗글에 ‘何必曰利’라는 뜻을 밝혔다. 정은 취함이니 위에서 아래를 취하고 아래에서 위를 취하느니라. 그러므로 가로되 서로 뺏는 것으로 사귐이다. 나라가 위태로와진다는 것은 이르되 장차 (아래에서 위를) 죽이고 뺏는 것의 화가 있음이다. 승은 수레의 수이다. 만승의 나라라는 것은 천자가 도읍한 안에 지방이 천리니 (천자가 나갈 때) 수레 만승이 나감이오, 천승의 집이라는 것은 천자의 공과 경으로 지방 백리를 캐먹으니(흔히 ‘采邑百里’한다) 수레 천승이 나감이다. 천승의 나라는 제후의 나라요, 백승의 집안은 제후의 대부이다. 시는 아래가 위를 죽임이오. 염은 족함이다. 말하되 신하가 인군한테 매양 십분에 그 일분을 취할지라도 또한 이미 많거늘 만약 또 의로써 뒷전을 하고 利로써 먼저 하면 즉 그 인군을 죽여서 다 뺏지 아니해서는 그 마음이 즐기어 써 족하지 못하느니라.

未有仁而遺其親者也며 未有義而後其君者也니이다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릴 자 있지 아니하며, 의롭고 그 인군을 뒤에 할 자 있지 아니하나니이다.

此는 言仁義 未嘗不利하야 以明上文하야 亦有仁義而已之意也라 遺는 猶棄也오 後는 不急也니 言仁者는 必愛其親이요 義者 必急其君故로 人君이 躬行仁義而無求利之心則其下化之하야 自親戴於己也라

이는 인의가 일찍이 이롭지 아니치 않음을 말해서 써 상문에 ‘亦有仁義而已’라는 뜻을 밝힘이다. 유는 ‘버릴 기’와 같고 후는 급하지 않음이다. 말하되(다시 말해) 어진 자는 반드시 그 어버이를 사랑하며 의로운 자는 반드시 그 인군을 급하게(우선으로) 여기느니라. 그러므로 인군이 몸소 인의를 행하고 利를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곧 그 아래가 화해서 스스로 어버이를 몸에 지느니라

王은 亦曰 仁義而已矣니 何必曰 利이니잇고

왕은 또한 인의만을 이르실 따름이시니 하필 利를 말씀하시니잇고

重言之하야 以結上文兩節之意니라

○此章은 言仁義는 根於人心之固有하야 天理之公也니 利心은 生於物我之相形하야 人欲之私也라 循天理則不求利而自無不利하ㄱ고 徇人欲則求利未得而害已隨之라 所謂毫釐之差 千里之繆는 此는 孟子之書 所以造端託始之深意니 學者 所宜精察而明辨也라

○太史公曰 予讀孟子書라가 至梁惠王 問何以利吾國하야는 未嘗不廢書而嘆也라 曰嗟乎라 利는 誠亂之始也니 夫子 罕言利는 常防其源也라 故로 曰放於利而行이면 多怨하나니 自天子로 以至於庶人이 好利之弊 何以異哉리오 程子曰 君子 未嘗不欲利하니 但傳以利爲心則有害하야 惟仁義則ㅇ은 不求利而未嘗不利也라 當是之時하야 天下之人이 惟利是求而不復知有仁義故로 孟子 言仁義而不言利는 所以拔本塞源而求其弊하시니 此는 聖賢之心也니라

거듭 말해서 윗글 두 마디의 뜻을 맺음이다.

○이 장은 말하되 인의는 인심의 진실로 있는데 근본한 것이니 천리의 공변됨이오, 利心은 물건과 내가 서로 형용한데서 나온 것이니 인욕의 사사로움이다. 천리를 따르면 곧 利를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롭지 않음이 없고 인욕을 따르면 즉 利를 구해서 얻지 못하고 해가 이미 따르니 이른바 호리의 차이가 천리의 어긋남이다. 이는 맹자의 글에 조단탁시(끝, 곧 인의로 실마리를 짓고 그것으로 시작을 붙여놓은)한 깊은 뜻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정밀하게 살펴고 밝게 분별해야 하느니라.

○태사공(司馬遷)이 말하기를 “내가 맹자의 글을 읽다가 ‘양혜왕이 묻기를 어떻게 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꼬’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글을 폐하고 탄식치 아니치 못했노라.” 가로대 “슬프도다, 진실로 난의 시작이로다. 공자께서 드물게 利를 말하사 항상 그 근원을 막았느니라. 그러므로 가라사대 利에 방종하면 원망이 많다 하셨으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利를 좋아하는 폐단이 어찌 다르리오.” 정자 가라사대 군자가 일찍이 利를 하고자 아니치 않지만 다만 利로써 마음을 가지면 해가 있음이요 인의로 하면 利를 구하지 않아도 일찍이 이롭지 아니치 않느니라. 당시 천하의 사람이 오직 利만을 구함이 옳다하고 다시 인의가 있음을 아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맹자가 인의를 말씀하고 利를 말씀하지 아니한 바 발본색원하야 그 폐단을 구원하시니 이는 성현의 마음이다.

孟子 見梁惠王하신대 王이 立於沼上이러시니 顧鴻鴈麋鹿曰 賢者도 亦樂此乎잇가

맹자가 양혜왕을 보신대 왕이 연못 가에 서 계시더니 기러기와 사슴을 돌아보며 가라사대 어진 자도 또한 이를 즐거워하니잇가?

沼는 池也요 鴻은 雁之大者요 麋는 鹿之大者니라

소는 연못이고 홍은 큰 기러기요 미는 큰 사슴이다.

孟子 對曰 賢者而後에 樂此니 不賢者는 雖有此나 不樂也니라

맹자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진 자가 된 후라야 이를 즐거워할지니 어질지 못한 자는 비록 이것이 있으나 즐거워하지 못하니이다.

此는 一章之大指니라

이는 일 장의 큰 가르침이라.

......


03 <명심보감> 계선편~효행편

명심보감은 명나라 범입본(范立本)이 1393년에 지은 책으로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본이 중국에서 출간된 후에 우리나라 청주에서 60년 만인 1452년 재판본이 나올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초학자들을 위한 한문교재였다. 이 책의 내용구성은 유교, 도교, 불교의 핵심사상에서 권선징악을 주제로한 내용을 발췌 수록한 글인데 여기서는 명심보감의 첫 편인 계선편에서부터 효행편까지 녹음되었다.

明心寶鑑

1. 繼善篇

子曰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갚느니라.

漢昭烈이 將終에 勅後主曰 勿以善小而不爲하고 勿以惡小而爲之하라.

한나라의 소열황제가 죽을 때 후주에게 조칙을 내려서 말하기를 선이 작다고 해서 하지 않지 말며 악이 작다고 해서 하지 말지니라.

莊子曰 一日不念善이면 諸惡이 皆自起니라.

장자가 말하기를 하루라도 착한 일을 생각지 않으면 모든 악한 것이 저절로 일어나느니라.

太公이 曰 見善如渴하고 聞惡如聾하라 又曰 善事란 須貪하고 惡事란 莫樂하라.

태공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보거든 목마를 때 물 본 듯이 주저하지 말며 악한 것을 듣거든 귀머거리 같이 하라. 또 말하기를 착한 일이란 모름지기 탐내야 하며 악한 일이란 즐겨하지 말라.

馬援이 曰 終身行善이라도 善猶不足이요 一日行惡이라도 惡自有餘니라.

마원이 말하기를 한평생 착한 일을 행하여도 착한 것은 오히려 부족하고 단 하루를 악한 일을 행하여도 악은 스스로 남음이 있느니라.

司馬溫公이 曰 積金以遺子孫이라도 未必子孫이 能盡守요 積書以遺子孫이라도 未必子孫이 能盡讀이니 不如 積陰德於冥冥之中하야 以爲子孫之計也니라.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돈을 모아 자손에게 넘겨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지키지 못하고 책을 모아서 자손에게 남겨 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읽지는 못하니 남모르는 가운데 음덕을 쌓아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하느니만 같지 못하느니라.

景行錄에 曰 恩義를 廣施하라 人生何處不相逢가 讐怨을 莫結하라 路逢狹處 難回避니라.

경행록에 말하기를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라. 인생이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만나지 않으랴?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라. 길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려우니라.

莊子曰 於我善者라도 我亦善之하고 於我惡者라도 我亦善之니라 我旣於人에 無惡이면 人能於我에 無惡哉인저

장자가 말하기를 나에게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도 내 또한 착하게 하고 나에게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도 내 또한 착하게 할 것이다. 내가 이미 남에게 악하게 함이 없으면 남도 나에게 악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니라.

東嶽聖帝垂訓에 曰 一日行善에 福雖未至나 禍自遠矣요 一日行惡에 禍雖未至나 福自遠矣니 行善之人은 如春園之草하여 不見其長이라도 日有所增이요 行惡之人은 如磨刀之石하여 不見其損이라도 日有所虧니라.

동악성제가 훈계를 내려 말하기를 하루 착한 일을 행할지라도 복은 비록 이르지 아니하나 화는 스스로 멀어진다. 하루 악한 일을 행할지라도 화는 비록 이르지 아니하나 복은 스스로 멀어진다. 착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봄 동산에 풀과 같아서 그 자라나는 것이 보이지 않으나 날로 더하는 바가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서 갈리어서 닳아 없어지는 것이 보이지 않아도 날로 이지러지는 것과 같으니라.

子曰 見善如不及하고 見不善如探湯하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착한 것을 보거든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고 악한 것을 보거든 끓는 물을 만지는 것과 같이 하라.

2. 天命篇

孟子曰 順天者는 存하고 逆天者는 亡이니라.

맹자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보존되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하느니라.

康節邵先生이 曰 天聽이 寂無音이나 蒼蒼何處尋고 非高亦非遠이라 都只在人心이니라.

강절소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의 들으심이 고요하여 소리가 없으니 푸르고 푸른데 어느 곳에서 찾을 것인가? 높지도 않고 또한 멀지도 않다. 모두가 다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느니라.

玄帝垂訓에 曰 人間私語라도 天聽은 若雷하고 暗室欺心이라도 神目은 如電이니라.

현제께서 말하기를 인간이 사사로운 말도 하늘이 듣는 것은 우레와 같으며 어두운 방 속에서 마음을 속여도 귀신의 눈은 번개와 같으니라.

益智書에 云 惡鑵이 若滿이면 天必誅之니라.

익지서에 이르기를 나쁜 그릇이 가득 차면 하늘이 반드시 베느니라.

莊子曰 若人作不善하여 得顯名者는 人雖不害나 天必戮之니라.

장자가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착하지 못한 일을 해서 이름을 세상에 나타낸 자는 사람이 비록 해치지 않더라도 하늘이 반드시 죽이느니라.

種瓜得瓜요 種豆得豆니 天網이 恢恢하야 疎而不漏니라.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다. 하늘의 그물이 넓어서 성글되 새지 않느니라.

子曰 獲罪於天이면 無所禱也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악한 일을 하여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느니라.


3. 順命篇

子曰 死生이 有命이오 富貴在天이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고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있느니라.

萬事分已定이어늘 浮生空自忙이니라.

모든 일은 분수가 이미 정하여져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부질없이 스스로 바쁘게 움직느니라.

景行錄에 云 禍不可倖免이오 福不可再求니라.

경행록에 이르기를 화는 요행으로는 면하지 못하고 복은 가히 두 번 다시 구하지 못하느니라.

時來風送滕王閣이오 運退雷轟薦福碑라.

때가 이르니 바람이 등왕각으로 보내고 운이 없으니 벼락이 천복비에 떨어졌느니라.

列子曰 痴聾痼啞도 家豪富요 智慧聰明도 却受貧이라 年月日時 該載定하니 算來由命 不由人이니라.

열자가 말하기를 어리석고 귀먹고 고질이 있고 벙어리라도 집은 큰 부자요 지혜 있고 총명하지만 도리어 가난하다. 운수는 해와 달과 날과 시가 분명히 정하여 있으니 계산해 보면 부귀는 사람으로 말미암음에 있지 않고 명에 있는 것이니라.


4. 孝行篇

詩曰 父兮生我하시고 母兮鞠我하시니 哀哀父母여 生我劬勞삿다 欲報深恩인대 昊天罔極이로다.

시에 이르기를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아 애닯다 부모님이시어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고 애쓰고 수고하셨도다. 그 은혜를 갚고자 하면 하늘과 같아 다함이 없도다.

子曰 孝子之事親也에 居則致其敬하고 養則致其樂하고 病則致其憂하고 喪則致其哀하고 祭則致其嚴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기거하심에는 그 공경을 다하고 봉양함에는 즐거움을 다하고 병드신 때엔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신 때엔 슬픔을 다하며 제사지낼 때엔 엄숙함을 다하느니라.

子曰 父母在어시든 不遠遊하며 遊必有方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부모가 살아 계시면 멀리 놀지 않으며 노는 것이 반드시 방향이 있어야 하느니라.

子曰 父命召어시든 唯而不諾하고 食在口則吐之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부모께서 명하여 부르시거든 즉시 대답하며 머뭇거리지 말고 음식이 입에 있거든 이를 뱉고 달려갈지니라.

太公이 曰 孝於親이면 子亦孝之하나니 身旣不孝면 子何孝焉이리오.

태공이 말하기를 자신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면 자식이 또한 나에게 효도하나니 자신이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지 않는다면 자식이 어찌 나에게 효도하겠는가?

孝順은 還生孝順子하고 忤逆은 還生忤逆兒하니 不信이어든 但看 簷頭水하라 點點滴滴 不差移니라.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는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식을 낳고 오역하는 자는 오역하는 자식을 낳나니 믿어지지 않거든 오직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보라 방울방울 떨어짐이 어긋남이 없느니라.

04 <천자문>

천자문은 중국 남북조시기 양나라의 주흥사가 엮었다고 하는 천 개의 한자를 네 글자씩 단어화하여 만들어 놓은 한문이 아닌 한자를 익히도록 고안된 글이다. 하루 저녁에 만들었다하여 백수문이라고 하며 철학적인 이치나 사상의 편전보다는 편찬에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으나, 글자를 익힘에는 초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天地玄黃 宇宙洪荒 日月盈仄 辰宿列張

寒來暑往 秋收冬藏 閏餘成歲 律呂調陽

雲騰致雨 露結爲霜 金生麗水 玉出崑岡

劔號巨闕 珠稱夜光 果珍李柰 菜重芥薑

海鹹河淡 鱗潛羽翔 龍師火帝 鳥官人皇

始制文字 乃服衣裳 推位讓國 有虞陶唐

弔民伐罪 周發殷湯 坐朝問道 垂拱平章

愛育黎首 臣伏戎羌 遐邇壹體 率賓歸王

鳴鳳在樹 白駒食場 化被草木 賴及萬方

蓋此身髮 四大五常 恭惟鞠養 豈敢毁傷

女慕貞烈 男效才良 知過必改 得能莫忘

罔談彼短 靡恃己長 信使可覆 器欲難量

墨悲絲染 詩讚羔羊 景行維賢 克念作聖

德建名立 形端表正 空谷傳聲 虛堂習聽

禍因惡積 福緣善慶 尺璧非寶 寸陰是競

資父事君 曰嚴與敬 孝當竭力 忠則盡命

臨深履薄 夙興溫淸 似蘭斯馨 如松之盛

川流不息 淵澄取暎 容止若思 言辭安定

篤初誠美 愼終宜令 榮業所基 籍甚無竟

學優登仕 攝職從政 存以甘棠 去而益詠

樂殊貴賤 禮別尊卑 上和下睦 夫唱婦隨

外受傅訓 入奉母儀 諸姑伯叔 猶子比兒

孔懷兄弟 同氣連枝 交友投分 切磨箴規

......

05 <적벽부> 전편

적벽부는 당송8대가의 한사람인 소식 즉 소동파의 대표적인 글로 인간과 자연의 애증을 서술하며 자연의 영원한 무궁함과 인간의 유한한 순간적인 현상을 유려한 필체로 써내려간 글이다.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특히 송대에 발달한 詞 문학의 비조로써의 역할과 당시와 대비되는 송시의 가슴으로 읽는 생각함, 냉정히 읽는 문학의 면모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는 글이다.

○赤壁賦前篇

壬戌之秋 七月旣望에 蘇子 與客으로 泛舟遊於赤壁之下할새 淸風은 徐來하고 水波는 不興이라 擧舟屬客하고 誦明月之詩하야 歌窈窕之章이어니 少焉에 月出於東山之上하야 徘徊於斗牛之間하니 白露는 橫江하고 水光은 接天이라 縱一葦之所如하야 凌 萬頃之茫然하

니 浩浩乎 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하고 飄飄乎 如遺世獨立하야 羽化而登仙이라. 於是에 飮酒樂甚하고 扣舷而歌之하니 歌에 曰 桂棹兮蘭槳으로 擊空明兮 泝流光이로다. 渺渺兮 余懷여 望美人兮 天一方이로다. 客有吹洞簫者하야 倚歌而和之하니 其聲이 嗚嗚然하야 如怨如慕하며 如泣如訴하고 餘音이 嫋嫋하야 不絶如縷하니 舞幽壑之潛蛟하고 泣孤舟之嫠婦라. 蘇者 愀然正襟하고 危坐而問客曰 何爲其然也오. 客曰 月明星稀하고 烏鵲이 南飛하니 此非曹孟德之詩乎아. 西望夏口하고 東望武昌하니 山川이 上繆하야 鬱乎蒼蒼이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아. 方其破荊州하고 下江陵하야 順流而東也에 舳艫千里이오 旌旗蔽空이라. 釃酒臨江하고 橫槊賦詩하니 固一世之雄也러라. 而今安在哉오 況吾與子로 漁樵於江渚之上하야 侶魚鰕而友麋鹿이라. 駕一葉之扁舟하야 擧匏樽而相屬하니 寄蜉蝣於天地에 渺滄海之一粟이니 哀吾生之須臾하고 羨長江之無窮하야 挾飛仙以遨遊하고 抱明月而長終이라. 知不可乎驟得일새 託遺響於悲風하노라. 蘇者 曰 客亦知夫水與月乎아. 逝者如斯로대 而未嘗往也며 盈虛者 如彼로대 而卒莫消長也니 蓋將自其變者而觀之則天地曾不能以一瞬이오 自其不變者而觀之則物與我皆

無盡也라. 而又何羨乎리오. 且夫天地之間에 物各有主하니 苟非吾之所有인댄 雖一毫而莫取어니와 惟江上之淸風과 與山間之明月은 耳得之而爲聲하고 目遇之而成色하야 取之無禁이오 用之不竭이니 是는 造物者之無盡藏也이오 而吾與子之所共樂이라. 客이 喜而笑하고 洗盞更酌하니 肴核이 旣盡하고 杯盤이 狼藉라 相與枕藉乎舟中하야 不知東方之旣白이러라.

임술 가을 7월 기망에 소자가 손과 배를 띄워 적벽 아래 노닐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 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술을 들어 손에게 권하며 명월의 시를 외고 요조의 장을 노래하더니, 이윽고 달이 동쪽 산 위에 솟아올라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서성이더라.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었더라.

한 잎의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 듯하여 그칠 데를 알 수 없고, 가붓가붓 나부껴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치어 신선되어 오르는 것 같더라.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니,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 삿대로 물에 비친 달을 쳐서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네. 아득한 내 생각이여, 아름다운 사람을 하늘가에 바라보도다’.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 하는 듯, 여음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을 춤추게하고 외로운 배를 의지해 살아가는 과부를 울릴레라. 소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루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 그러한가?’ 하니,

손님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의 시가 아닌가?

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이 서로 얽혀 빽빽하고 푸른데, 여기는 맹덕이 주랑에게 곤욕을 치른 데가 아니던가? 바야흐로 형주를 격파하고 강릉으로 내려감에,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가니,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어라.

술을 걸러서 강가에 가서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의 영웅일진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를 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함에랴.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고, 하루살이 삶을 천지에 의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 알 좁쌀알이구나. 우리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의 끝없음을 부럽게 여기노라. 날으는 신선을 끼고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길이 마치는 것은 갑자기 얻지 못할 줄 알새, 끼치는 소리를 슬픈 바람에 부치노라.

소자 말하되 “손님께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는가?”

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되 마침내 줄고 늚이 없으니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 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손이 기뻐하며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드니 안주가 다하고 잔과 쟁반이 어지럽더라. 배 안에서 서로 팔을 베고 누워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어라.


●시창(詩唱)

시창이란 5언이나 7언으로 된 한문시를 낭송조로 부르는 소리이다. 율창(律唱)이라고도 한다.

06 등왕각시

이 시는 당나라 초기 초당사걸 이라 일컬어졌던 "왕발"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등왕각서 라는 문장 속에 실려있는 시이다. 아버지의 근무지를 찾아가다가 장원을 정해놓고 실시하는 백일장에 참여하여 장원의 영예를 차지했다는 고사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로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이다.

○滕王閣詩

滕王高閣臨江渚 등왕의 높다란 누각 강가에 우뚝한데

佩玉鳴鑾罷歌舞 옥을 차고 방울 울리던 이들 놀이 끝났네

畵棟朝飛南浦雲 화려한 들보는 아침에 남포의 구름이 날고

珠簾暮捲西山雨 주렴엔 저물녁 서산의 비가 개인다오

閑雲潭影日悠悠 한가한 구름과 연못 그림자 날로 유유한데

物換星移度幾秋 사물 바뀌고 세월감에 그 얼마이던가

閣中帝子今何在 누대에 있던 원영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檻外長江空自流 난간 밖 장강만이 속절없이 흐르누나


07 영남루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신석균의 시로써 천고의 절창이라 칭한다. 한 가을날의 저물녁에 우리나라 3대 누대 중 하나인 밀양의 영남루에 올라 작자의 눈에 비친 풍광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감정의 애절함을 칠언율시의 품격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여 경치와 정감을 절묘하게 교차시켜 매조지한 작품이다.

○嶺南樓

西風人依嶺南樓 갈바람에 누구인가 영남루에 기대노니

水國靑山散不收 아랑강과 푸른 산들 헤일 수 없다네

萬戶笙歌明月夜 집집마다 젓대와 노랫가락의 달밤이요

一江漁笛白雲秋 강가 고깃배 피리 소리는 흰 구름 속일세

老僧院裏疏鐘晩 노승의 절간에선 아련히 종소리 들리고

烈女祠前落葉流 열녀의 사당 앞엔 낙엽만이 흩날리누나

滿眼蘆花三十里 눈에드는 갈대꽃은 삼십 리에 가득한데

無愁鷗鷺下長洲 기러기떼 근심없이 백사장에 내려앉네


08 경 - 오방동토경

동토란 동티라고도 하며 오방신장의 원력으로 집주인이 보호된다는 경문이다. 흔히 집안 등에서 부엌.화장실.대문.장독대.굴뚝을 옮기거나 새로 짓고, 또한 헌 물건이나 옷가지 등을 집안에 들였을 때 대주신의 노여움으로 재앙이 생겨 "동티났다"라고 하는데 이 경문으로 물리친다.

○五方動土經

나무동방청제용왕동토신

나무남방적제용왕동토신

나무서방백제용왕동토신

나무북방흑제용왕동토신

나무중앙황제용왕동토신

갑자장군동토신

갑술장군동토신

갑신장군동토신

갑오장군동토신

갑진장군동토신

갑인장군동토신

자축장군동토신

인묘장군동토신

진사장군동토신

오미장군동토신

신유장군동토신

술해장군동토신

나무동방청제부인동토신

나무남방적제부인동토신

나무서방백제부인동토신

나무북방흑제부인동토신

나무중앙황제부인동토신

삼백십이동토신

팔만사천동토신

태세방동토신

규세방동토신

사부방동토신

오귀방동토신

생문방동토신

백호방동토신

년월일시동토신

포백철물동토신

가토가석동토신

가목가수동토신

여시일시동토신

가택헌희 신수봉행 장예초토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지 소작자 하유죄호 차가중 건명 갑자생 병지시근 즉위속가천리 음응국극여 율영사파하

...반복...


09. 10. 당음 (여름 글) - 오언시 / 칠언시

당음은 당나라 때의 한시 중 오언절구와 칠언절구 중에서 그 대표적인 것만을 간추려 편집한 절구 시집이다. 이 책은 원나라 때 양사굉 이라는 사람이 편찬했고 오언절구(오언시) 195수 칠언절구(칠언시) 205수가 실려있다. 우리나라 학자들에게 일찍부터 애송된 바, 글방에서 글을 읽던 학동들이 여름날 비좁은 글방을 벗어나 시냇가에 모정이나 원두막을 짓고 주로 읽었다 하여 여름글 이라고도 불리는 한시학습의 교재다. 오언시 5수와 칠언시 6수를 담았다.

○途中寒食

馬上逢寒食 말위에서 한식을 만나니

途中屬暮春 고향 가는 도중에 늦봄 되었구려

可憐江浦望 가련하다 강 포구를 바라보니

不見洛橋人 낙교 위에 고향 사람들 보이지 않네

○別杜審言

臥病人事絶 병들어 누워 인사도 못하는데

嗟君萬里行 아 그대는 멀리 떠나는구려

河橋不相送 황하 다리에서 서로 전송하지 못하나

江樹遠含情 강가의 나무 멀리 우리의 정을 머금었네


○昭君怨

漢道方全盛 한나라는 바야흐로 전성기라

朝廷足武臣 조정엔 무신들로 넘쳐나는데

何須薄命妾 어찌하여 운명은 기박한 첩에게

辛苦事和親 괴롭게도 화친을 일삼게 하는가



○昭君怨 其二

昭君拂玉鞍 소군이 옥 안장을 떨치고

上馬涕紅頰 말위에 오르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흐르네

今日漢宮人 오늘은 한나라 궁녀인데

明朝胡地妾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의 첩이 된다네

○昭君怨 其五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어

春來不似春 봄인데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저절로 옷의 띠가 느슨해진 것은

非是爲腰身 허리 몸매 위한 것은 아니라오


○蛾眉山月歌

蛾眉山月半輪秋 가을밤 아미산에 반달이 떠서

影入平羌江水流 달빛이 평강강 물로 흘러 들어가네

夜發淸溪向三峽 밤에 청계를 떠나 삼협으로 향하는데

思君不見下渝州 그리운 그대 보지 못하고 유주로 가네

○送孟浩然

故人西辭黃鶴樓 황학루에서 벗을 서역으로 보내고

烟花三月下揚州 꽃피는 삼월에 양주로 간다네

孤帆遠影碧空盡 배는 아스라이 허공 속에 사라지고

唯見長江天際流 하늘 끝으로 흐르는 장강물만 보노매라


○山中問答

問余何事棲碧山 날더러 왜 산중에 사냐길래

笑而不答心自閑 빙그레 웃을뿐 마음은 저절로 한가하이

桃花流水杳然去 도화는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내려 가니

別有天地非人間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일세

○山中對酌

兩人對酌山花開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데 산꽃이 피었네

一杯一杯復一杯 한 잔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

我醉欲眠君且去 나는 취해 졸리니 그대는 가시게

明朝有意抱琴來 내일 아침 뜻 있으면 거문고 안고 오시게


○送元二使安西

渭城朝雨浥輕塵 위성의 아침에 비 내려 먼지를 적시고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엔 푸르고 푸른 버들잎 새로워라

勸君更進一杯酒 그대에게 권하노니 술 한 잔 더하게나

西出陽關無故人 양관을 떠나 서쪽으로 가면 친구도 없으리


○春夜洛城聞笛

誰家玉笛暗飛聲 어디선가 어둠 뚫고 들려오는 피리소리

散入春風滿洛城 봄바람에 흩어져 낙양성에 가득하네

此夜曲中聞折柳 이 밤 노래 속에 절류곡도 들려오니

何人不起故園情 누구인들 고향생각 나지 않으리

 

11 축문: 기제사, 시제

일반적으로 일 년에 한 번 씩 돌아오는 부모와 증조의 제사 때에 읽는 기제사 축문과, 그 이상 선대의 제사를 모아서 일년 에 한 번 길일을 택해 온 친족들이 함께 추념하는 시제를 올릴 때 읽는 시제 축문이다.


○父母祝文

維 歲次壬辰 五月壬子朔 二十五日 丙子

孝子吉童 敢昭告于

顯考學生府君

顯妣孺人安東金氏 歲序遷易 顯考諱日復臨

追遠感時 昊天罔極

謹以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曾祖祝文

維 歲次壬辰 五月壬子朔 二十五日 丙子

曾孫吉童 敢昭告于

顯曾祖考學生府君

顯曾祖妣孺人安東金氏 歲序遷易 顯曾祖考

諱日復臨 追遠感時 不勝永慕

謹以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時祭祝文

維 歲次壬辰 十月己卯朔 二十五日癸卯

五代孫吉童 敢昭告于

顯七代祖考 嘉義大夫 行同知中樞府事府君

顯七代祖妣 貞夫人杞溪兪氏之墓

歲薦一祭 禮有中制 履玆霜露 不勝感慕

謹以淸酌庶羞 祇薦歲事 尙


12 국문소설 - 사씨남정기

글을 모르는 아낙네와 촌부들을 위하여 주로 서당의 훈장이 소설을 읽어주는 소리를 일부 담았다. 사씨남정기는 조선조 비운의 천재인 서포 김만중의 한글소설이다. 내용의 배경은 중국을 무대로 했지만 숙종 때 후궁인 장희빈의 문제로 귀양 가 있던 김만중이 당시 궁중의 패륜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밝혀 교훈을 삼았던 것이다. 즉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정숙하고 현명한 사씨는 인현왕후를, 흉악하고 교활한 교씨는 장희빈을 빗대었으며, 교씨의 모함으로 눈이 어두워진 유연수는 숙종을 빗대어 애기를 풀어간 것이다. 김만중은 사씨남정기에서 권선징악과 미의 안팎이 다르다는 것, 또한 결과보다는 일련의 과정을 중시하고, 측근의 올바른 선택에 대하여 교훈적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명나라 세종 황제 시절, 북경 순천에 유희라는 지체 높은 사람이 살았는데 성의백 벼슬을 지낸 유기의 후예였다. 유희는 학식이 뛰어나 예부상서 벼슬에 있었다. 이때 엄숭이란 사람이 태학사 벼슬에 있었는데 유희와 마음이 맞지 않았다. 유희는 병이 났다고 하며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황제께서 그 상소를 허락하시고 특별히 태자소사란 직함을 내려 계속해서 권세를 누릴 수 있게 해주셨다.

이후 유희는 비록 조정의 일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명성만은 온 나라에 진동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부인 최씨와 화목하게 지냈다. 그에게는 우애가 지극한 누이 한 명이 있는데 두씨 가문에 시집을 갔다가 남편을 여의었다.

유희에게는 연수란 아들이 있는데,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유희는 어린 아들을 매우 사랑했지만 엄하게 길렀다. 연수가 열 살이 되자 글재주가 뛰어났고 품행이 단정했다. 유희는 그렇게 기특한 아들을 부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연수는 열다섯 살에 과거에 급제했다. 감독관이 장원으로 뽑고 싶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3등으로 뽑았다. 황제께서 즉시 연수를 불러 보시고는 한림편수 벼슬을 내리셨다. 연수는 황제의 은혜에 감사를 드린 후 아직 자신의 학식이 부족하다고 하며 10년의 말미를 간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황제께서 그 뜻을 기특하게 여겨 허락하셨다. 성현의 글을 열심히 읽고 임금 섬기는 도리를 ㄱ갖추어 스무 살이 되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셨다. 유희 부자는 이러한 황제의 은혜에 지성으로 감사를 드렸다.

유한림이 과거에 급제한 후로 청혼하는 집안이 많았지만 한 곳도 마땅한 데가 없었다. 하루는 유소사가 누이인 두부인과 함께 한림의 혼사를 의논하다가 매파들을 불러 좋은 신붓감이 있는 곳을 물어 보았다. 그 중 한 늙은 매파는 유독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다른 매파의 말이 그친 뒤 불쑥 입을 열었다.

“노야께서 만일 부귀를 원하신다면 엄승상의 딸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고 굳이 용모와 덕성을 구하신다면 신성현에 사는 사급사 댁의 처자만한 여자가 없사옵니다. 청컨대 두 곳 중에서 택하소서.”

유소사가 말했다.

“부귀는 애초에 바라는 바가 아니다. 어진 사람을 택하고자 한다. 사급사는 청렴하고 정직하여 대간 벼슬로 있다가 귀향을 가면서 죽은 사람이라. 마땅한 혼처라고 생각하지만 그 딸의 착하고 악한 여부를 알지 못하겠노라.”

매파가 대말했다.

“소인의 사촌 아우가 그 댁 종으로 있으면서 처자를 젖 먹여 길렀고, 소인도 수 년 전에 그 댁에 갔다가 본 적이 있사옵니다. 그때 처자의 나이 열세 살이라. 한 눈에 보아도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움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생김새를 말하자면 마치 달나라에 사는 선녀가 내려온 듯 하옵니다. 다른 하인의 말을 들으니 처자가 여공은 물론이거니와 학식을 두루 갖추어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더이다.”

두부인이 이 말을 듣고는 손으로 무릎을 치며 말했다.

“몇 년 전 우화암에 있는 여승 묘혜가 나에게 말하기를 신성현의 사소저는 용모가 아름다울뿐더러 덕성까지 갖추어 참다운 요조숙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좋은 신붓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라버니께 미처 전하지 못했습니다.”

유소사가 말했다.

“누이와 매파의 말을 들으니 그 처자가 뛰어난 듯 하구나. 그러나 혼인이란 큰 일을 경솔하게 결정할 수 없으니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좋겠는데”

두부인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나이다. 내 집에 당나라 사람이 그린 귀한 관음화상이 있는데 마침 우화암으로 보내려고 하는 터입니다. 묘혜에게 이 화상을 주어 사씨 집으로 가서 관음찬을 받아 오게 하면 사소저의 재주를 알 것입니다. 그러면 묘혜가 소저의 얼굴도 볼 수 있을것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유소사가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묘한 생각이로구나.”

두부인이 묘혜를 불러 말했다.

“그대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씨 집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려는데 신부의 됨됨이를 알 길이 없는 탓이오. 그대가 관음화상을 가지고 사씨 집에 가서 소저에게 찬문을 받아 오면 될 것이니 부디 수고를 아끼지 말게”

묘혜가 허락하고 화상을 가지고 사급사의 집으로 갔다. 사급사 부인은 원래 묘혜를 알고 있었다. 즉시 묘혜를 불러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려. 오늘은 무슨 마음으로 왔소?”

묘혜가 대답했다.

“소승의 암자가 지은 지 오래되어 다 허물어졌습니다. 이제 겨우 보수가 끝나 가는데 감히 부인께 시주를 청하러 왔나이다.”

부인이 말했다.

만일 불사에 쓰는 것이라면 어찌 시주를 아끼리오.하지만 가난한 집에 재물이 없으니 안타깝구려. 대관절 그대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고?”

묘혜가 말했다.

“암자를 고치고 난 뒤 마침 관음화상을 시주하는 집에 있었사옵니다. 이 화상은 당나라 사람이 그린 명화지만 찬양하는 글이 없음이 한 가지 흠이라. 만일 귀댁 소저의 빛나는 글솜씨로 찬문을 지어 주신다면, 글을 보배로 여기는 우리 불가에서는 이보다 더 큰 시주가 없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소저께서도 복을 받아 장수하실 것이옵니다.”

부인이 말을 듣고는 말했다.

“우리 딸이 비록 글을 많이 읽었지만 이런 찬문을 잘 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하여튼 딸에게 물어나 보세.”

말을 마치고는 시녀를 명하여 소저를 부르니 소저가 모친의 명을 받아 연보를 움직여 당도했다. 묘혜가 살펴보니 그 모습은 마치 관음보살이 하강한 듯 했다. 속으로 매우 감탄하고는 일어나 합장하며 말했다.

“소승이 4년 전에 소저를 뵌 적이 있는데 능히 기억하시나이까?”

소저가 말했다.

“어찌 잊으리오.”

부인이 소저에게 물었다.

“이 스님이 멀리서 와서 너에게 찬문을 구하고자 한다. 네 능히 지을 수 있겠느냐?”

소저가 대답했다.

“소녀의 옹졸한 재주로 어찌 찬문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글은 여자가 할 바가 아니옵니다. 지금 스님이 부탁하지만 시행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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