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월하문화재단에서 보내준 해설서 자료로 일부만 1-5집에 나누어 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달을 지고 세월을 노래한 正歌의 名人
최자영(작가 / 여창가곡이수자)
▪불우한 유년과 전쟁으로 다시 태어난 삶
선생께서는 1918년 2월 8일 경기도 교양군 한진면 보광리(지금의 이태원 근처)에서 부친 김희문(金凞汶)씨와 모친 이(李)씨 사이에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의 운명은 너무도 가혹하여 겨우 두 살 때 당시 창궐했던 호열자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쌍둥이 오빠를 포함한 가족 4명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으로 거의 실성하다시피한 아버지는 가출해 버리고 큰언니는 외가로, 둘째언니는 어느 집 민며느리로, 갓난아기였던 선생은 이모집에 맡겨졌다. 그곳에서의 생활도 잠시, 어린 그는 어느 분의 소개로 과부 모녀로 살고 있는 유씨 부인댁의 양녀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 교양과 덕을 지닌 가정이어서 그곳에서 성장하는 동안 바느질이며, 예의범절을 배웠다.
그러던 중 어느날 갑자기 얼굴조차 모르고 헤어졌던 부친을 상봉하게 된다.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이 유씨가문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김덕순(金德順)이라는 본명도 찾게 된다.
16세 되던 해에 6년 연상인 안씨 성을 가진 분을 중매로 만나 결혼하였다. 부인을 극진히 아꼈던 부군께서는 선생을 묘동교회 부설, 묘동학원 야간부 고등과에 진학시키고 신학문과 양재까지 배우게 했다.
그런 신혼의 즐거움은 너무 짧았고, 얼마 후 민족의 비극 6.25 한국전쟁을 겪게 되었다. 당시 양주 군청에 근무하였던 부군 안씨는 가족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공산당원에 의해 납치되고 말았다. 30세 초반의 선생께서는 남편과 재산전부를 잃고 재봉틀 하나만 이고 피난길에 올랐다.
정착한 곳은 부산 대신동이었는데 거기서 선생은 채소 생상이며 바느질 품팔이 등 안한 것이 없을 정도로 몸을 혹사시켰다. 마침내 과로와 영양실조, 거기에 신경성 위궤양까지 겹쳐 몸져 눕게 되었다. 병색은 날로 깊어가고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단 한발자국도 옮겨 놓지 못하는 처절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집주인의 권유로 구덕(九德)수원지로 산책을 나갔다.
자연 경관이 좋았던 구덕수원지(지금은 없어짐)에서는 서울에서 피난내려온 유명인사들이 모여 시국을 한탄하며 시조창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매일 산책하는 동안 차츰 건강도 회복되어 갔고 비록 먼발치에서나마 듣다 보니 시조를 조금씩 따라 부를 수도 있게 되었다.
선생의 천부적 재질은 이렇게 해서 전문가의 눈에 띄게 되었고 곧바로 현포(玄圃)김태영(당시 인천정악전승소 사범)님께 소개되어 처음으로 경제(京制) 평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 등을 불과 몇 개월만에 다 배웠다. 그때 선생의 연령은 35세였다.
그 무렵 부산 용두산에서 발족했던 국립국악원이 환도에 맞추어 서울로 가고 그 자리에 부산국악원이 생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두봉(斗峰)이병성 님을 만나 본격적인 歌曲, 歌詞, 時調를 배우게 된 것이다. 그 시절 부산국악원 시우들로부터 아호 월하(月荷)라는 이름을 얻었다.
달 아래 피어난 연꽃, 또 다른 뜻으로 ‘달을 짊어지고 있다.’는 뜻을 지녔으니 선생의 용모와 음성에 썩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선생께서는 時調사범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1958년 이승만 대통령 생신축하 기념행사로 대규모 국악경연이 열렸을 때 출전하였다가 時調부 장원에 올랐다.
이듬해 오아시스 레코드 음반취입을 하였고, 선생의 명성은 전국으로 알려져 방송출연, 초청연주회, 時調강사로 초빙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그렇게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분주히 지내시다가 1960년 11월 십년만에 서울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었다.
▪타고난 美聲, 그리고 그의 음악세계
늦깎이로 국악에 입문하여 그것도 고차원적인 가곡을 한치의 어긋남 없이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천부적인 음악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해맑은 성색은 가곡이 지닌 특성을 살리는데 너무 잘 맞아서 그는 정가적인 조건을 두루 갖춘 예인으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대개 명인들은 자기 분야의 한 곳에만 능통할 뿐 그 범주를 벗어나면 실력의 차이를 보여주는데 월하 선생은 예외였다.
가곡, 가사, 시조 중 모든 분야를 놓고 보아도 가창에 완벽하여 어느 곡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정하기 힘들 정도이다.
우조 이수대엽 ‘버들은 실이되고 꾀꼬리는 북이되어....’ 와, 선생이 즐겨 부르던 계면 이수대엽 ‘언약이 늦어가니 정매화도 다지거다....’같은 곡을 들을 때면 관객들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그의 노래에 빨려든다. 여창 가곡의 전통을 살리면서 곡태를 아름답게 승화시켜 선(禪)의 경지까지 끌어 올리는 힘이 그의 노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 중거, 평거, 두거, 농· 낙· 편에 이어 마지막을 장식하는 최종곡 ‘태평가’에 이르기 까지 거침없이 완창 하였다.
또한 12가사 중 처사가, 양양가, 길군악, 매화가 등 4곡을 제외한 8곡을 두봉 선생으로부터 배웠는데 너무도 잘 따라 부르는 제자 월하의 노래를 듣고 스승은 크게 기뻐하며 ‘성색의 단아함과 장려함’에 감탄했다고 한다.
두봉과 소남(이주환)은 이왕직 아악부에서 가곡과 가사를 체계 있게 전수시켜 온 하규일 선생의 직계제자로 당시 성악계의 우뚝한 봉우리였다.
전쟁의 와중에서 당대의 두 거장을 만남으로 월하는 새로운 인생으로 태어났고 정가계 여성창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여창이 등장하는 시기는 대략 19세기 초엽으로 보여진다.
그것도 문헌으로만 기록되었을 뿐 여창가곡의 역사는 지극히 미약하고 짧은데다가 곡도 독창적이라기 보다 남창의 파생곡으로 남성수용자들를 위주로 일부 기녀들이 불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황무지에서 실낱같이 유지되던 여창가곡의 맥을 이어 대중 앞에 알리고 여류가창자들을 길러 내는데 앞장선 그의 등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춘면(춘면)을 느짖 깨어 죽창(죽창)을 반개하니
정화(정화)는 작작한데 가는 나비를 머무는 듯........
마치 명주실을 풀어내듯 고운음성으로 춘면곡을 부를때면 가는 나비도 멈추게 할경지에 이르렀으니 스승의 찬사를 받았음이 이해가는 일이다.
그밖에 백구사, 죽지사, 상사별곡 등 가곡 못지않게 가사도 잘 불렀던 선생은 국악을 전공하려는 후학들에게 엄격하고도 분명한 지도력으로 정가를 전수시켰다. 월하선생의 가곡창을 가리켜 흔히 시조목을 많이 쓴다고 한다.
이것은 섬세한 경과음을 대범하게 쓰면서 '쪼들목’으로 ‘턱턱 놓는 대목’ 등이 많은 데서 하는 평이다.(‘타고난 미성의 시조목 김월하’ 한만영 1985) 이창법은 두봉의 특기였다. 두봉 역시 가곡과 가사에 이런 시조목을 써서 멋을 부렸는데 그런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월하 역시 그런 창법이 묻어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소남도 이와 비슷한 창법을 썼으니 소남에게서 배운 엮음지름시조(휘몰이시조) ‘푸른 산중하에’ 와 ‘창내고자’ 시창 ‘관산융마’ ‘권주가’등이 이 창법에 적용된다.
월하 선생의 시조의 바탕은 경제(경제)로서, 산세굴곡이 분명하고, 경기인심처럼 예리한 표현이 강조되도록 읊었다.
부산에서부터 시조사범으로 활동하다가 서울로 옮겨온 후 그는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1968년 말에는독일 국제방송국 초청으로 예술의 고장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3개국 7개 방송국 공개 방송에 나가 가곡, 가사, 시조를 불러 그곳에 모인 세계 각국의 음악인들의 화호와 갈채를 받았다.
한편 <월하정가선>(月下正歌選)을 출간하여 후학지도를 체계 있게 했다.
그의 노래와 음악성에 대해서 이런 논평까지 나와 있다.
‘월하는 타고난 미성이다. 고음에서의 속청은 젓대와 같은 음색을 띠는데 본청과 속청의 음량이 다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한만영, 전 국립국악원장)
‘이 시대가 낳은 김월하의 음악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서도 청청한 하늘을 우러러 맑게 피어난 한떨기 청련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장)
월하 선생의 노래는 그만큼 현세의 잡념을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그토록 청아하고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가창에 완벽했으니 국악계의 원로 성경린 선생께서는 그를 가르켜 ‘월하 이전에 월하 없었고 월하 이후에도 월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기자와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가곡은 하면 할수록 어렵습니다. 자신이 가진 음성을 혼신을 다해 모두 써야 하는데다가, 길게 끌면서도 잡스러운 소리가 들어가서는 안 되니 그게 좀 어려워요? 그래서 가곡은 열명이 부르다가 열한명이 달아나 버린다고도 하지요. 스승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선생은 그 어려운 정가를 부르는데 있어서 때로는 산에서 바위가 구르듯, 또는 깊은 계곡을 휘돌아 내리는 청류처럼 세월의 흐름까지 멈출 듯 자유자재로 곡의 묘미를 살리면서 가곡이 지녀야 할 품위와 절도를 그대로 지켜 최고의 노래로 승화시켰다.
그의 노래에 반주 또한 당시 국악계를 이끌던 명연주자로 김성진, 김준연, 김만홍, 박영복 선생 등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기라성 같은 분들이었다.
월하 선생의 음색은 영롱할 만큼 깨끗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깊은 애조가 배어있었으니, 아마도 선생의 평탄치 못했던 인생역정이 노래 속에 그대로 용해되어 그렇게 표출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月荷선생의 업적과 공로
새 인생을 살게 된 선생께서는 노력만큼 재물도 모여 상경하자마자 종로 YMCA 뒤편에 반듯한 한옥을 장만하였다. 선생의 관심은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그처럼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열심히 재산을 모아 우수학생에게 장학금혜택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배출된 장학생은 100여명이 넘었다.
지금 국악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김경배 (남창가곡보유자,경북대교수), 홍종진(이화여대교수), 박문규 (전 국립국악중교감), 우종양(원광대교수), 김영동(전 시립국악관현악단 지휘자), 황의종(부산대교수), 이재화(추계예대교수), 김영기(당시 전수조교, 현재 제30호 가곡보유자) 등은 모두 선생님의 우수 장학생들이었다.
슬하에 한점의 혈육도 두지 못한 선생께서는 오갈데 없는 3명의 고아를 길러 시집까지 보내었다. 제자들을 모두 자녀로 생각하시던 선생께서는 김경배 교수를 양자로 삼아 의지하였다.
정악 전반에 관한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피난시절 현포(玄圃)로부터 익힌 時調를 비롯하여 임석윤님에게서 사설시조를, 소남(韶南) 이주환님께 남녀창을 습득한다. 소남 선생과는 부산에서부터 교류가 있었으나 KBS 경창대회 때 국악원에 들른 것이 인연이 되어 본격적인 수업을 받기 위한 두 번째 사제지간이 되었다.
선생의 향학열은 식을 줄 몰라서 틈틈이 익힌 거문고와 양금으로 영산회상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이창배님에게서 서도 시창 관산융마(關山戎馬)를, 인영환님으로부터 우조지름시조를, 또한 홍원기님께 우조시조를, 이대우(광주)님께 사설시조와 사설지름시조를, 정운산님께 시창 ‘십이난간’ ‘십재경영’까지 배웠다. 그렇게하여 月荷선생께서는 열세분의 스승을 통해 歌曲, 歌詞, 時調를 익혔다.
마침내 1970년 전국 시우단체 총연합회 회장에 올랐고,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30호 여창가곡(女唱歌曲)보유자로 지정받는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선생께서는 한복 한 벌을 가지고 35년을 입으면서 모은 50여억원으로 마침내 1991년 7월 月荷文化財団을 설립했다.
원불교와 인연을 맺었던 그는 말년에 종로 교당에 나가 수도하였다. 그러다가 병고로 1년여 몸져누웠다가, 1996년 정월에 14명의 이수자를 남긴 채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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