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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명[부제포함] <박봉술 춘향가 전집>
음반 번호 TOPCD-096 , CD 4 매
제작 / 기획사 예술기획탑
발매 연도 2005
구 분 일반반
분 류 판소리
업데이트 일시 2005-11-12
비 고
* 미의회도서관 기증(2006.6.7.) * 2008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예술과 국악음반 해외보급사업 기증음반



 
<박봉술 춘향가 전집>

CD 1 :
1. 방자설경(숙종대왕 직위초에~처분하여서 가옵소서) 03:28
2. 도련님 치장(이애 네 말로~만성견자 수불애라) 02:01
3. 적성가(광한루 당도하야~만나를 볼까) 02:56
4. 춘향추천(좋다 좋다 호남의~방자를 불러서 말을 헌다) 03:57
5. 방자전갈(이애 방자야~아나였다 이애 춘향아) 02:51
6. 춘향 그른 내력(춘향이 깜짝놀래~잔말 말고 건너가자) 02:54
7. 각도산세(네 말을 듣고보니~내가 돌아서 간다) 01:48
8. 춘향집 경치(춘향이 이 말 듣더니마는~다만 생각 춘향이라) 04:14
9. 천자뒤풀이(글을 읽어~아이고 보고지고) 06:27
10. 춘향집 건너간다(보고지고 소리를~알연성이 기이허구나) 04:47
11. 춘향 방치레(도련님 체면이 있는지라~분향야독서라) 04:49
12. 백년가약(두렷이 모도 붙였구나~아이고 내 신세야) 04:33
13. 도련님 배앓이(도련님이 이말 듣더니~건넌방으로 건너가 주었구나) 02:36
14. 긴사랑가(도련님과 춘향이 단 둘이 있어노니~네가 알려무나) 05:05
15. 자진 사랑가(아시씨요 내사 싫소~설마 둥둥 내사랑) 03:32
16. 정자, 궁자 타령(아이고 참 말도~어어 좋구나) 02:14
17. 승자타령(이애, 그는 그만두고~그날 그날을 지낸다) 02:14 총 60:34

CD 2 :
1. 도련님 고민(이렇게 지낼적에~말이나 하고 울란 말이요) 03:11
2. 춘향기절(도련님이 춘향 말기는~죽는 줄이나 아시래라) 05:54
3. 춘향모 발악(그때에 춘향 어모는~아니 다려 가고는 못 견디리라) 05:55
4. 이별가(텍 밑을 바짝 괴고~떼구름 속의가 들겄구나) 12:33
5. 신연맞이(그렁저렁 올라가시고~고동은 뛰뛰뛰) 05:52
6. 기생점고(객사에 연명하고~예 등대 나오) 04:11
7. 군로사령(기생점고 다하였소~통깨졌다 나오너라) 02:36
8. 갈까부다(그때여 춘향이는~내방으로 들어가세) 06:25
9. 백구타령(춘향 잡으로 왔던~예이이이 소년들) 01:57
10. 행수기생(하하하하 잘 부른다~나는 못 살겄네) 03:39
11. 수청거절(그렁저렁 관문 안을~창녀 자식이라고 그리 마오) 05:15 총 57:32

CD 3 :
1. 십장가(사또이 오장이 벌컥 뒤집혀져~떼구름 속의 가서 들겄구나) 11:11
2. 남원골 오입쟁이(스물치고 짐작헐까~떨떨거리고 나는 간다) 02:21
3. 남원기생들과 춘향모(그때에 남원읍중 여러 기생들이~복통단장성으로 울음을 운다) 06:44
4. 옥중가(그때 춘향어모와 향단이는~조섭이나 잘 하게) 09:03
5. 과거장(그렁저렁 세월을 보낼적에 그때에 이도령은~전라도로 내려온다) 03:48
6. 서리역졸 분발(남대문밖 썩 내달라~광한루로 대령하라 예이) 01:34
7. 어사행장(각처로 분발시킨 후에~땅만 보아도 반갑구나) 02:31
8. 농부가(그때는 어느 땐고~자 쉬세) 05:51
9. 어사또와 방자(농부들이 논두럭에~옥중 아가씨를 살려주오) 05:25
10. 춘향상서(방자가 울며 편지를 내어주거날~방성통곡으로 울음을 운다) 04:03 총 52:35

CD 4 :
1. 박석티(이렇다시 설리 울다가~둘이 앉어서 울음을 운다) 06:11
2. 춘향모 어사상봉(어사또 가만히 서서~내방으로 들어가세) 06:11
3. 춘향모 자탄(방으로 들어가 앉은 후에~퍼버리고 울음을 운다) 04:00
4. 향단의 만류(어사또 만류허되~이래가지고는 처가에 못오나) 03:00
5. 파루(그는 그만두고 시장헐 적에는~칼머리만 안었구나) 05:33
6. 옥중재회(아가 춘향아 어미가 왔다~우지 말라면 우지 마라) 05:39
7. 본관생신잔치(이애 춘향아, 마음놓고 오늘밤만~감상청을 찾아가오) 02:21
8. 어사또 수작(어사또 기가 막혀, 이놈을 날 놓아라~가성고처 원성고라) 04:35
9. 어사출도(아니 이거 큰 일 났구나~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04:29
10. 출도후 공사(그때에 어사또는 통인을 불러~춘향 올렸소) 03:24
11. 춘향의 호소(어사또 보시더니마는~당장의 목숨을 끊어주오) 02:57
12. 이화춘풍(어사또 가만히 듣더니마는~이런 경사를 모르신고) 04:39
13. 뒤풀이(그때에 춘향 어머니가~뉘가 알리 더질 더질) 03:59 총 57:05

* 소리:박봉술. 고수:김명환.
* 녹음자료제공·해설 : 이보형(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
* 사설교정 : 송순섭(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 관련증언자료 : 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편집교정 : 이진원(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 사설고증 : 송재익(광주 진만초등학교 교사)
* 책임채록 : 이재옥(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 원교정·편집·마스터링 : 양정환(탑예술기획)

* 녹음 / 1971.12.2 이보형 소장 녹음자료
* iDrector / 양정환 (음제1442호) / ⓟ&ⓒ: Yang Jeong-hwan, www.gugakcd.com
·Cover Design / Musong
·Manufactured by HWAEUM. 2005.10. Seoul, Korea www.gugakcd.com

● 이 음반은 순천시의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 정말 귀한 음반이 나왔다. 처음 소개되는 박봉술 명창의 춘향가 완창 음반이다. 이보형 선생이 소장한 자료가, 송순섭 명창의 노력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순천시의 지원으로 나오게 되었지만, 여기에서 나온 이익금은 박봉술 명창의 유업을 기리는데, 사용하겠다는 좋은 뜻도 있으니, 판소리를 좋아하는 애호가의 많은 성원을 바라는 바이다. 해설서 자세하고, 사진 자료도 있고, 가사도 정성들여 실려있다.(2005.11.12)
 
* 해설서에서 :

●박봉술 춘향가 음반을 발간하며

송 순 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박봉술 선생님의 춘향가 음반을 드디어 발간합니다. 일찍이 저를 판소리의 길로 이끌어주셨던 박봉술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한평생 판소리의 길을 걷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제가 박봉술 선생님의 소리에 반한 것은 신세계레코-드주식회사에서 박봉술 선생님이 녹음하여 발간한 10인치짜리 음반에 담겨있는 판소리를 들었을 때입니다. 그 자그마한 음반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저를 매료시켰고, 그 후 박봉술 선생님으로부터 적벽가·흥보가·수궁가를 배우게 되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송씨 문중으로 내려오는 동편제의 법통을 잇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의 이러한 소리 인생을 통해서 항상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박봉술 선생님으로 내려오는 송씨 문중의 춘향가의 맥을 제가 잇지 못하였다는 것이며, 그 소리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남아 있음에도 이를 널리 알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언젠가는 반드시 박봉술 선생님의 춘향가 음악을 발간하여 우리 선생님의 뜻을 다시 한번 세상에 내놓고 싶었습니다만 항상 기회가 저에게 주어지지 않았기에 실망은 더욱 컸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해에 박봉술 선생님 생전에 당신의 춘향가 한 바탕을 친히 사재를 털어서 녹음해둔 이보형 선생님으로부터 그 녹음 사용을 허락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네 장의 CD음반으로 복각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우선 그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을 조달하는 것이 문제였고, 박봉술 선생님의 노래하신 춘향가의 사설의 정리도 필요했으며, 여러 가지 잡다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 이를 먼저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박봉술 선생님의 춘향가 음반 전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이보형 선생님이 자료 공개를 허락하신데 대해서 고마움을 전하고, 이 음반 발간에 경제적으로 재정을 도와주신 순천시에도 큰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제 가슴 속에는 돌아가신 박봉술 선생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했다고, 박봉술 선생님이 남기신 춘향가를 이 세상에 빛을 보게 했다는 조그마한 만족감을 느낄 만도 하지만, 이것이 초석이 되어 앞으로 박봉술 선생님이 남기신 춘향가가 널리 불려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아직도 제가 걸어야 할 길이 더 많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음반을 사랑해주시고, 많이 들어주시는 것이 저에게 많이 힘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면서, 이상 박봉술 선생님의 춘향가 음반 발간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박봉술제 춘향가 음반에 대하여

이 보 형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박봉술(1922~1989) 명창의 춘향가 녹음 자료가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기획하여 음반으로 나왔으니 기적과 같은 일이다. 박봉술 명창과 순천시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인가?

박봉술 명창은 전라남도 구례 태생이지만 한창 활동하던 시절을 순천에서 오래 살았다. 박봉술 명창이 순천에서 오래 살았던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첫째는 순천 시민이 두루 소리를 좋아할 뿐더러 소리 속에도 밝아서 박봉술 명창과 같이 목은 궂지만 소리 가지고 나가는 길이 기가 막힌 명창을 알아주었던 것이고, 둘째는 전형적인 동편제 소리를 지니고 있는 박봉술이 동편제 판소리 고장인 순천에 살았다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박봉술이 동편소리를 지닌 것은 그가 동편제 고장에서 태어나 동편제 판소리를 학습한 데 기인하지만 한편 집안에서 동편소리를 전승하고 있는 내력이 있다. 그것은 두 가지 내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내력은 그가 아주 어려서 소리를 배웠던 그의 장형인 박봉래가 동편제 명창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운 수제자였다. 송만갑이 누가인가? 송만갑은 근대 5명창 중에 하나이며 가장 치밀한 소리를 구사하는 대명창일 뿐 아니라 동편제 소리의 종손이다. 팔명창의 하나로 꼽히고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 추앙되는 송흥록이 종조부요, 친조부가 대명창 송광록이요, 부친이 송우룡이니 송만갑은 동편제 종손이라 할 수 있다.

송흥록 - 송광록 - 송우룡 - 송만갑 - 박봉래 - 박봉술

또 다른 내력은 박봉술 명창의 집안에 내려오는 소리인데 부친 박만조 옹이 소리 명창이라 집안 소리로 동편제 소리를 전승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만조 옹의 큰아들 박봉래가 공부할 때 집안 식구들이 모두 이를 터득하여 집안 소리에 전승되는 되는 소리뿐만 송만갑의 소리에도 두루 능하였던 것이다.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웠던 박봉술의 장형 박봉래가 일찍 작고하자 부친 박만조 옹은 막내아들인 박봉술에게 기대를 걸고 그를 명창으로 키우고자 하였다. 부친 박만조 옹과 박봉술의 형들 모두 온 집안이 두루 나서서 박봉술을 명창으로 키우는데 총력을 기우렸던 것 같다. 그가 서리 공부를 얼마쯤 한 뒤에 명창으로 이름이 나자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에게 소리를 닦이기도 하였다.

박봉술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판소리 다섯 바탕에 두루 능하였다. 이 가운데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는 음반으로 나와서 세상에 두루 퍼졌다. 적벽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것이니 문화재관리국에서 적벽가 음반을 내었고, 흥보가와 수궁가는 한국 부리태니커 뿌리깊은나무에서 음반을 내었다. 그러나 박봉술의 동편제 춘향가는 미처 음반을 취입하지 못하고 박봉술 명창이 타계하고 말았다.

이번에 박봉술 명창의 춘향가 음반을 내게 된 내력이 있으니 그것은 필자와 박봉술 명창과의 인연 때문에 춘향가 녹음 자료가 남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에 박봉술 명창이 시골에 살다가 상경하였다. 당시에는 국악 공연이 거의 없었고 방송에서는 판소리를 거의 내보내지 않던 때라 국악인들이 살 길이 없어 무작정 상경하여 할일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때 박봉술 명창 또한 일이 없어 서울 이문동에 살던 김명한 명고수 댁에 와서 소일하곤 하였다. 필자는 그때 김명환 명고수에게 북을 배우던 때인데 어느날 김명환 선생이 박봉술 선생의 춘향가를 소개하며 좋은 바디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필자도 듣고 감명을 받았다. 그 즉시 박봉술 명창이 유고시를 대비해서 이를 녹음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절실히 느끼고 녹음을 서둘었다. 드디어 김명환 명고수의 북장단으로 박봉술 명창이 춘향가 전바탕을 녹음하였고 필자의 사재를 내어 사례비로 드렸다.

그 뒤에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에도 박봉술 명창이 출연하여 녹음도 하였고 또 문예 진흥원 판소리 기록화작업에서는 녹음을 하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박봉술 춘향가 자료는 모두 공개 되지 않았고 그 자료의 소재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필자의 박붕술 춘향가 자료가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필자는 동편제 춘향가 자료로 유일한 박봉술 명창의 춘향가를 음반으로 내여 세상에 공개 하고자 하였으나 음반으로 출반할 여력이 없어 차일피일하던 차에 이번에 순천시에서 기획하여 박봉술 동편제 춘향가 음반을 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번에 순천시의 주선으로 내는 박봉술 춘향가 음반은 지금까지 공개된 지 않았고 전승이 끊어져 동편제 춘향가의 유일한 자료인 것이다. 이 춘향가 음반에는 송만갑제와 박봉술 집안에 내려오는 소리의 정수가 담긴 것이다. 광한루 대목, 사랑가 대목, 옥중가 등등 대목 마다 동편제의 깊고 절묘한 소리가 담겨 있어 들을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그 서슬이 기세등등한 동편제 소리가 장쾌하기 이를 데 없다. 다만 끝에 정정열제 어사출도가 끼어 있어 색깔이 튄다.
이 음반의 출반으로 박봉술이 전승하던 동편제 춘향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로 말미암아 박봉술 춘향가가 처음으로 공개되어 전승의 길이 열리기를 바란다.
●명창 박봉술과 춘향가, 관련 증언자료

노 재 명 (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박록주를 비롯한 여러 명창들의 증언과 박봉술, 송만갑, 정정렬 등의 춘향가 녹음을 비교해서 판단해 보면 박봉술의 춘향가는 그의 부친인 박만조, 친형 박봉래·박봉채, 스승 송만감(박봉술 춘향가 전반부), 정정렬(박봉술 춘향가 후반부)의 소리제 등이 섞여있다고 생각된다.

박봉술은 그 중에서도 가족인 박만조, 박봉채의 춘향가 가르침과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보형의 증언에 따르면 박봉술의 춘향가 중 덜렁제 <'궁'자 노래>를 들은 박록주가 예전에 유공렬이 그렇게 소리했다고 말했다 한다.

송순섭의 말에 의하면 강창범의 조부가 보던 춘향가 필사 창본(장자백제 추정)의 사설이 박봉술 춘향가와 유사했다고 한다.

박록주 명창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박봉술은 1960년대를 전후로 한 시기에 판소리 다섯바탕을 다 잘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명창으로 인정받았다. 그 중에서도 춘향가는 판소리의 꽃으로 꼽히는 소리이고 박봉술 또한 중요한 판소리인 이 춘향가를 아주 공들여 익히고 수많은 시간 정성껏 독공 연마를 한 것으로 보인다.

박봉술의 춘향가는 성음, 붙임새, 장단, 공력 등의 완성도 면에서 대단히 훌륭한 소리지만 오늘날 전승이 거의 끊어져 버렸다. 그가 1989년까지 생존해 있었는데도 그의 춘향가는 후학들에게 거의 전해지지 못했다. 박봉술이 문화재보호법상 적벽가 인간문화재였기에 거의 모든 후학들이 그의 적벽가만 집중적으로 학습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보형 학자가 오래전에 사재를 들여 연구용으로 남겨 놓은 박봉술 명창의 귀중한 춘향가 녹음이 뒤늦게나마 이렇게 음반화된 것을 무척 다행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를 계기로 본 녹음자료가 박봉술의 후학들에 의해 복원되고 널리 불려지기를 기원해 본다.

그리고 덧붙여 본 춘향가 녹음에서 북반주를 맡은 김명환 명고수의 고법도 소중한 연구거리이자 탄성이 절로 나오는 감상거리라 하겠다. 1989년 같은 시기에 타계한 박봉술 명창과 김명환 명고수의 기가 막힌 조화가 판소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판소리 유파 발표회나 완창 공연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두 거장이 작고한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이제 이들의 이름도 전설처럼 회고되고 있다.

다음은 필자가 여러 국악인들을 찾아 현장 조사, 대담을 나눈 내용 가운데 박봉술 명창 관련 주요 증언 부분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박봉술 명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한승호 증언]
한승호는 아주 어려서부터 박봉술과 가깝게 지내고 함께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다. 한승호의 말에 따르면 박봉술은 목이 상하기 전에도 성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한다.(박록주, 김여란 등의 증언에 따르면 박봉술은 목이 손상되기 이전인 아주 젊어서는 송만갑처럼 목이 잘 나오고 기가 막히게 소리를 잘했다고 함)

한승호는 과거에 박봉술, 김동준, 유대봉, 정권진과 가까웠는데 그 벗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지금은 집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고 재미가 없고 무척 허전하다고 한다.
한승호는 예전에 그 국악 친구들과 주로 술을 마시고 놀았고 음주시 박봉술은 국악 외에도 <청포도 사랑>(1958년 도미 노래, 이화촌 작사, 나화랑 작곡)이라는 대중가요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한승호는 유공렬 명창을 목격한 적이 없으며 춘향가 중 <'궁'자 노래>를 덜렁제로 하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다.

[박춘홍 증언]
박봉채(박봉술 형)의 장녀 박춘홍은 오로지 박봉술에게만 판소리를 배웠다 한다. 박춘홍의 말에 따르면 박봉술은 성품이 꼿꼿하여 싫으면 싫은 거지 싫은데 듣기 좋으라고 꾸며서 말을 못했다 한다.

박봉술은 우조 위주로 동편 소리를 했고 제자가 제대로 갈 데를 다 가야 다음 소리를 가르치지 설익게 하는 것을 못보았다 한다. 박봉술은 제자들에게 모두 똑같이 가르치지 않고 사람에 따라 목을 봐서 다르게 가르쳤다고 한다.

증언에 의하면 박봉래는 33세에 이북 청진에서 작고했고 박봉채는 박춘홍(1936년 생) 11세 때 40세의 나이로 타계했는데 박봉래와 박봉채 모두 한약방을 경영했다고 한다.
박봉채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면서기를 하기도 했고 박춘홍은 부친 박봉채 작고 후 숙부 박봉
술 손에 자랐다고 한다. 박봉술의 장인 최동신은 대금 명인이었다 한다.

박봉술은 판소리 외에도 꽹과리, 가야금, 아쟁, 설장고 등 다방면에 두루 능했고 목이 상하기 전에는 성음이 참 좋았다고 한다. 박만조가 아들 박봉술이 어릴 때 사탕을 먹이며 소리를 가르쳤는데 변성기 때 이성에 눈을 떠서 목이 꺾였다고 한다.

박봉술이 목 손상 후 상성이 안나와서 주경야독하여 터득한 희성은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한다. 박봉술은 부친 박만조 외에 송만갑에게도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박봉술은 자진모리 붙임새가 특기이며 박봉술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맛있게 소리를 잘 붙여 나갔다고 박춘홍은 회고하였다.

[조순애 증언]
조순애의 남편 김동준은 192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박동실, 박봉술, 김연수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소리뿐 아니라 북, 장고, 가야금으로도 명인이었고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로 활동하다 1990년 작고하였다 한다.

[박송희 증언]
박송희는 17∼18세 때 박초선 등과 함께 광주 증슴사라는 절에서 김영준(본명, 예명:김억순)에게 적벽가 중 <동남풍 비는 데>∼<조자룡 활 쏘는 데> 등을 배웠다 한다. 김영준은 <동남풍 비는 데>를 박봉술하고 사뭇 다르게 불렀고 김영준의 이 대목은 진양조-자진모리로 짜여져 있었다고 한다.

박록주가 1960년대에 박봉술에게 적벽가 좀 박송희한테 가르쳐 주라고 해서 박송희는 박봉술 문하에서 적벽가, 수궁가 중 <용왕 탄식>∼<도사 등장> 등을 배웠다 한다.

1980년대 초반에 몇 개월간 허규 주도로 국립창극단 단원이 모두 단체로 정권진 문하에서 심청가를 배울 때 박송희도 함께 그 소리를 익혔다 한다. 당시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배운 판소리 특별 강좌로는 이밖에도 정광수 강의 수궁가, 박봉술 강의 적벽가가 있었고 그후 1987년에는 성우향이 심청가와 춘향가를 국립창극단 단원들에게 가르쳤다 한다.

박송희의 말에 의하면 박봉술의 꺾인 목은 짧은 목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박송희의 증언에 따르면 박록주는 생전에 박봉술을 가리켜 '소리왕'이라고 하면서 "나 죽으면 이제 소리 배울 사람 박봉술이밖에 없다"고 했다 한다. 예전에 사람들이 "오바탕은 박봉술밖에 안가지고 있다"고 말들 하였다 한다. 현재 박송희는 적벽가를 박봉술제로 부르고 있다 한다.

[강순영 증언]
강순영은 19세 때부터 5년 동안 스승인 신관용과 함께 호남창극단에 소속되어 공연 활동을 했다 한다. 당시 호남창극단에는 박봉술, 강도근, 강사홍, 강종철 같은 남자 명창과 정채란, 최설향, 김명화, 강옥련 같은 여류 명창이 있었다 한다. 당시 창극 공연을 하면 박봉술, 강도근 같은 남자 명창들은 중역을 맡았고 젊은 여류 명창들은 단역을 맡았다 한다.

[송순섭 증언]
송순섭이 공대일 문하에서 소리를 학습할 당시 광주공원에서 살던 전행화(작고)라는 이가 박봉술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적벽가를 배우고 있었는데 공대일이 그 학습 현장을 늘 왕래하며 박봉술의 소리가 대단하다면서 늘 감탄하고 그 소리를 조금씩 따가지고 와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송순섭은 박봉술이 얼마나 소리를 잘하길래 공대일이 그렇게 늘 칭찬을 할까 궁금해 하던 차에 우연히 1962년경에 박봉술 흥보가 음반(신세기레코드 제작 10인치 LP)을 듣게 되었고 과연 대명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제서야 공대일의 감탄이 이해가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송순섭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1963년 부산에 박봉술 명창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거기로 달려가서 그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단가 <사창화류>(엇중모리), <진국명산>, <적벽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 세바탕을 완창으로 배웠다 한다.

송순섭 왈, 박봉술은 목이 탁한데도 각고의 노력으로 득음을 해서 목이 꺾여 불가능한 고음도 공력으로 극복한 점이 경이로우며 그 공력 만큼은 박봉술을 따를 이가 없고 사설 발음이 매우 정확하다고 한다.

송순섭이 박봉술을 존경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박봉술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설에 오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고쳐서 불러도 괜찮다고 한 점이라 한다. 그래서 송순섭은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일부 잘못된 사설을 많이 수정하였다 한다.

박봉술은 어디 좋은 소리가 있다고 하면 제자들을 그리로 보내서 소리를 배워 보라고 적극 권했다 한다. 그래서 송순섭이 박봉술에게 심청가를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정권진한테 가보라고 하면서 “거기 것도 좋으니라”고 말하였다 한다. 송순섭은 박봉술에게 심청가와 춘향가는 한대목도 배우지 못했고 이점이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아쉽다고 한다.

예전에 안향련, 신영희가 목포로 박봉술을 소리 선생으로 모시고 가서 적벽가를 배웠는데 송순섭 왈, 신영희의 적벽가는 들어보지 못했고 언젠가 안향련의 적벽가를 들어봤는데 기가막히게 잘했다 한다.

[한농선 증언]
한농선은 39세 때(1972년) 박봉술 문하에서 적벽가를 배웠다 한다.

[이옥천 증언]
이옥천은 25세 무렵부터 7년 동안 박록주 집에서 박봉술에게 적벽가와 수궁가 전바탕을 배웠다 한다. 박록주와 김길희가 이옥천에게 적벽가를 배워두어야 한다면서 부산에 있던 박봉술을 서울로 데리고 왔다 한다. 이때 귀명창 김길희가 재정적으로 많이 후원해 주었다 한다.

이옥천의 증언에 따르면 김득수가 "박봉술은 예나 지금이나 목이 궂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옥천은 박봉술이 당대 최고의 남자 명창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 꺾인 목을 가지고 기발한 소릿길을 구사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이옥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옥천이 김명환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박봉술은 젊어서 목이 좋았으며 목이 꺾인 후에도 공력 만큼은 대단하다"고 말하였다 한다.

이옥천은 박봉술이 술을 퍽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옥천은 박봉술이 음주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옥천은 박록주 집 방안에서 박봉술과 마주앉아서 박봉술이 부르는 것을 따라 불러서 배웠다고 한다.

현재 이옥천의 적벽가와 수궁가는 대체로 박봉술의 소리제인데 적벽가 중 <삼고초려>에는 정광수의 소리제를 가미했고 수궁가 중 초입∼<약성가>에는 정권진의 소리제를 가미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이옥천은 박봉술에게 배운 적벽가를 즐겨 부른다고 한다.

[백인영 증언]
백인영의 말에 따르면 안향련은 원래 호남지방서 아주 활동을 많이 한 자신의 아버지 안기선에게 어려서 판소리를 배웠고 나중에 박봉술(적벽가), 정응민한테 소리를 사사했다고 한다.

[왕기석 증언]
왕기석은 1980년 국립창극단 연수단원으로 입단했고 1983년에 정단원이 된 후 지금까지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동 중이라 한다. 왕기석은 바로 이 창극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아주 값진 인연들을 갖게 되었고 당대 최고 판소리 대가들의 소리와 발림 지도를 받을 수 있었으며 창극 경험도 충분히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여년간 국립창극단에서 마련한 특별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왕기석은 창극단 단원들과 함께 정권진에게 심청가, 박봉술한테 적벽가, 정광수에게 수궁가, 성우향한테 춘향가와 심청가, 오정숙에게 흥보가를 배울 수 있었다 한다. 왕기석은 당시 박봉술의 적벽가 지도과정을 녹음한 테입을 현재 소장하고 있다 한다.

왕기석이 창극단 퇴근 후 박봉술, 박후성, 강종철과 같은 대가들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하며 흡수한 판소리론, 구전심수로 터득한 예인관 역시 보배로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왕기석의 증언에 따르면 박봉술은 음주시 기분 좋으면 벽에 기대어 서서 대중가요 <청포도 사랑>을 즐겨 불렀다 한다.

그리고 언젠가 창극 공연시 무대 가까이에 놓여져 있던 가야금을 박봉술이 장난스럽게 연주하여 후배들이 관객들한테 들리니 멈춰 달라고 하자 그럼 집에 간다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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