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서에서 :
박덕근의 예술 세계
해설/ 이자균(한국민속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경기도 광주 역말이란 곳에서 태어난 박덕근은 가야금 부문의 인간문화재인 이모 성금련 명인에 의해 잽이로서의 운명을 안게 되었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구김살 없는 유년기를 지난 박덕근은 특별한 풍파없이 자랐으며 중학을 졸업할 무렵 이모 성금련의 권유로 국악예술학교에 입학했다. 국악예술학교에 다니면서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쉽사리 적응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모 성금련 명인과 이모부 지영희(피리의 명인) 명인이 그 학교의 선생으로 계시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가까운 친척이신 두 분 선생님이 계신 학교 생활이기에 품행과 수업태도 등에 남달리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학년 말경에 처음으로 연주공연을 가졌고 공연을 정신없이 끝내고 나니 모두들 훌륭했다! 잘했다! ... 격찬이었다.
박덕근은 참으로 스승 덕이 많은 이이기도 하고 핏줄을 잘 타고 난 탓에 민속 음악을 잘 할 수 있는 밑바탕을 두루 갖추었다.
부친은 국악을 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가야금의 명인 성금연의 막내 여동생이라서 더욱이 그러하다.
외조부 성기봉이 아들 딸을 고루 낳아서 그중 가장 막내 딸이 모친인 팔례인데 지금은 평범한 가정 살림을 하는 이이지만 이도 한창 때는 언니인 성금연한테 소리를 배운 재주꾼이었다.
박덕근은 본디 이런 집안 분위기 탓에 한양공고를 입학을 하려고 하다가 당시 이모부인 지영희와 이모인 성금연의 권유로 국악 예고에 입학을 하여 지영희(1919-1980)한테 피리를 배웠다.
당시 국악예술고에는 민속음악이나 춤 등에 종사하는 이는 그야말로 반짝 반작 빛나는 대가 선생들로서 진용을 구성하여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예술학교를 졸업을 하고 한동안 활동을 하다가 젊은 기운에 동래 온천장에 가서 만 삼년간을 그야말로 신선 같이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많은 민속 음악계의 대 선배들을 만나면서 민속 음악의 자양분을 얻게 된다.
박덕근이 접해 보지 못한 이들과 같이 상종한다는 것은 이녁의 음악을 살찌우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며 더욱이 이모부가 지영희이요 이모부가 성금연이라 하니 - 때로는 이런 인척 관계가 걸림돌이 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 더욱더 비온 뒤 죽순 돋듯 재주가 늘었음은 물론이고 활동이 아주 많아졌다.
동래 온천장은 조선조 숙종때부터 온천이 유명하여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런 곳에서는 풍류가 있기 마련이어서 한다하는 한량들은 풀방구리 모여들 듯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 하였다.
여기에서 담양 출신으로 가야금으로 이름을 떨친 원옥화의 딸을 맞아들여서 지아비로서 뜻을 세우고 살아가다가 원옥화가 1976년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뜨자 서울로 와서 둥지를 틀게된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모부뻘인 전태용 명인과 같은 나이 많은 이들과 어울려서 주야장천 가무음곡을 즐기면서 생생하게 접한 민속 음악계의 실상은 민속 음악계의 역사를1960년대의 이후로는 비슷하게 활동한 또래의 동연배나 선배들보다 남 못지 않은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민속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깊은 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피리 가락은 지영희한테 배운 가락을 주로 하지만 민속 음악 하는 이들이 꼭 스승 것만은 판박이로 하지는 않는 법이어서 박덕근도 나름대로의 가락을 짜서 집어넣어 연주한다. 또한 그는 호적수의 전통을 잇고 있는 중견 연주가이다. 협율사가 한창 흥행할 시절 깃발 날리던 호적수 지영희 선생이 이모부로 국악예술학교 재학시 지영희에게서 호적을 배웠고 뒤에 3년간 개인적으로 배운 것이 그를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이번 박덕근의 호적은 능계가락이 주가 되는 경기도제 호적이다. 굿거리장단으로 시작하여 느릿느릿 멋을 내다가 자진모리로 활달하게 이끌어가다가 동살풀이가락으로 몰며 흥을 돋구다가 다시 휘모리로 경쾌하게 마친다. 서자침으로 기묘한 가락을 뽐내고 엇가락으로 묘미를 부리면 풍악소리의 진맛이 절로난다.
태평소는 옛 말에 “수제비 만드는 사람이 국수 못 만드랴” 하듯이 같은 관악기인데 피리를 불면 대개는 관악기를 연주하는 법이어서 아쟁은 이녁이 스스로 익히고 배워서 새로운 가락을 짰다.
악기는 역시 가락과 “김”이 좋아야 됨은 고금천지를 뒤집어 보아도 내려 오는 말인데 오척단구의 단단한 체구에서 나오는 피리 가락은 “김”이 매우 좋으며 곁들여서 하진옥의 장고 반주는 간이 잘 밴 동치미 같이 아삭삭한 맛을 풍겨준다.
이는 오랫동안 갈고 닦은 학습 덕분이며 가락 역시 많은 이들과의 교류와 또한 외가의 음악적 자산 또한 무시 할 수 없는데 이녁은 굳이 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1977년 군 제대 후 오로지 연주자로서의 길을 정진하기로 결심하고 78년 KBS 주최 한미 우정의 사절단으로 도미한 것을 비롯하여 88년 유럽 순회공연, 1982년 일본공연,1984년 캐나다 및 LA문화 올림픽 참가공연, 1985년 한일 수교 20주년기념 일본공연 등 수 차례의 해외공연을 통하여 자신의 기량을 선보이며 그 음악의 폭을 넓혀 나갈 수가 있었다.
곡목 해설
1. 메나리제
“제”라는 말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조선창극사>를 쓴 정노식이 사용하기 시작을 하여 그 뒤로 민속 음악에 두루 사용하기 시작을 하였는데 여기에 “메나리제”라고 하는 것은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남북 일부 지역에서 음악 어법을 말하는 것으로 다른 지역의 육자백이 토리, 경토리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음악 어법은 그 지방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라남북도의 육자백이 토리는 그 지방의 음악 어법에 맞게끔 부르고 한스러움과 때로는 비장함, 화평한 특징을 갖는 게 특징이며 경토리는 한수 이북의 경기도 지방의 음악적 어법으로서 경쾌하고 음악적인 특징이 화사한 멋이 풍겨나며 메나리제는 투박하지만 깊은 맛이 있고 간단하되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음악적 어법이 있으며 깊은 맛에서 우러나오는 질박한 것이 특징이다.
2. 청성곡
청성곡은 본디 정악 음악에서 연주하는 곡이며 민속 음악에서는 아주 드믄 곡으로서 청성이라는 말은 “맑다” 라는 뜻이 아니고 “음이 높다” 는 뜻이며 대금 독주로 흔히 연주하는 곡목이다.
3-1. 노랫가락
본디 시조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하는 설도 있으나 이는 부회한 점이 있으며 몇몇 시조집에 실려 있기는 하나 서울, 경기도 굿에서처럼 시조를 하지는 않으며 약간 변형이 되어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반 가곡 가사 명창들이 부르는 것이나 일반의 가객들이 부르는 것은 같으나 굿에서 무녀들이 부르는 노랫 가락은 조금 다르며 가사 또한 판이하게 다르고 새남 굿을 할 적에 조상 굿을 할 적에는 노랫 가락을 그대로 한다.
3-2. 청춘가
이팔 청춘가인데 노랫 말로 보아서는 조선조 후기에 생긴 노래임이 분명하며 이 노래는 전국에 걸쳐서 보편적으로 전해 내려 오는 민요이다.
피리의 뒷손으로 튀기는 맛이 일품이며 경쾌한 가락이 시종여일하다.
3-3. 창부타령
이는 서울, 경기도 강신무들이 부르는 창부거리에서 반주하는 창부 타령조의 음악이 본디의 창부 타령조 음악인데 선율이 너무 뻣뻣하니까 전태용이라는 명창이 엇부침과 시김새를 맛있게 구사하여 부른 것이 지금처럼 창부타령조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서울, 경기도의 강신무들이 부르는 창부타령은 일년 액을 막아 보자는 의미에서 일년 도액풀이를 하는 것에서부터 부르는 것이고 조선 팔도 광대가 들어 오는 장면을 주워 섬기는 창부타령조는 각 지방의 광대들이 서울로 입성하는 장면을 재미있게 묘사한 대목이다.
4. 호적 시나위(굿거리, 잦은몰이, 굿거리)
시나위는 경기도, 전라도, 경남, 이북의 산이들이 삼현육각 반주로 굿을 할 적에 하는 음악을 시나위라고 하며 호적 시나위는 다재다능한 한일섭과 창극단과 사당패에 다니던 방태진이라는 이가 일천구백육십년 쯤 무렵에 반주하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을 하여 지금은 악기를 하는 이 치고는 한 가락 쯤 부는 일이 되었다.
본디 호적은 삼현육각 편성에 들지 않으나 소리가 너무 커서 농악대나 일제 시대에 선전을 하기 위해서 가두 선전을 하기 위해서 분 악기이며 절에서는 쌍호적을 불며 그 쓰임새가 많지는 않은 악기이나 요즈음은 연주를 많이 하며 여기에서 시나위라고는 하지만 격에 짜여진 장단을 치는 것이 아니고 선율에 따라서 “달고가기”도 하고 “풀기”도 하고 “몰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서 반주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시나위와 호적의 멋진 궁합이며 타악을 하는 이들이 13년 전에 고별 공연을 한 이래로 처음 다시 만나서 박덕근과 호형호제 하면서 반주하는 것은 마치 실개천 물이 속삭이듯 냇물이 흘러 가듯 다시 모여서 큰 강으로 흘러 가고 이윽고 큰 대양의 바다로 빠져 나가는 듯한 음악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5. 대감놀이
대감놀이는 서울, 경기도, 황해도, 이북의 일부 지방에서 여흥으로 하는 굿거리인데 이런 굿거리는 일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본디 집 굿에서 터를 위하는 지신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은 습속이 변하여서 대감놀이가 보편화하여 여흥을 하는 거리로 전락을 하였으며 노는 거리는 불사거리(제석거리)에서 한 판 흐드러지게 노는게 원칙이었다.
6. 아쟁 시나위(굿거리, 잦은몰이)
아쟁은 정악에서 사용하는 대아쟁이 있고 민속 음악에서 사용하는 아쟁이 있는데 아쟁의 최초 연주자는 일제 시대에 최승희 반주를 한 박성옥(1919-199?)이라는 이가 처음이며 그 뒤로는 장월중선, 한일섭, 정철호, 김일구, 윤윤석, 서용석, 박종선 등이 연주를 하였다.
아쟁은 음폭이 커서 다른 음악을 덮는(?) 흠이 있기는 하나 음폭 만큼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흡인력이 세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미어지게 하기도 하는 재미있는 악기이다.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며 마구 휘졌다 다시 허공에 뿌리는 작렬함이 버무려져서 내는 음색은 아쟁만이 내는 별다른 맛이며 진미이다.
|
|
|